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2003 칸 영화제 결산 - 정성일[6]
박은영 2003-06-07

굶주린 짐승처럼 영화를 탐식하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정성일의 칸영화제 오디세이, 그 마지막 장

칸=정성일/영화평론가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이미 수상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나는 수상결과에 관심이 없다. 그건 파트리스 셰로와 11명의 심사위원들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칸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칸에 관한 나의 이야기는 수상결과와 상관없는 것이다(상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그 영화가 좋아질 리 없으며 수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는 없다.

우선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이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잘못이다. 만일 그가 <어둠 속의 댄서>에서 빈손으로 돌아갔다면, <도그빌>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미’ 인터뷰에서 “모든 결과로부터 홀가분하다!”고 대답했다. 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는 ‘아주 집중해야만’ 장점을 알 수 있는 영화이다. 느리고, 눈에 돋보이는 장면을 자제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평이한 척하면서도 그 안에 복잡한 심리적 관계가 얽히고 설킨다. 하지만 영화제는 소용돌이 같은 영화들이 우선권을 쥐게 마련이다.

물론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가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구스 반 산트는 새로운 경지에로 점핑했으며, <엘리펀트>는 단 한마디로 걸작(!)이다. 그러나 누리 빌게 세일란의 <우작>와 드니 아르캉의 <야만족의 침공>은 안일한 결과이다. 잘 짜여진 주제, 적당한 유머, 그리고 뻔한 휴머니즘, 여기에 몇몇 장면들이 번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순간적으로 번쩍(!)거리는 그 섬광같은 장면들이 일시적으로 그들을 눈멀게 만든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심사위원단은 한편에 두개씩의 상을 주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이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물론 프랑수아 오종과 헥토르 바벤코, 클로드 밀레, (정말 의외이기는 했지만) 베르트랑 블리에가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소쿠로프, 가와세 나오미, 피터 그리너웨이,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지지하는 영화들에 대한 보고서이며, 동시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항의서한으로 읽혀야 한다. 나는 지금 칸와 맞장 뜨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과의 말씀. 나는 독자 여러분을 대신해서 정말 있는 힘을 다해서 보았다. 그래서 경쟁부문 전작과 주목할 만한 시선 전작, 그리고 감독주간 14편을 보았다. 하지만 역시 비평가 주간을 상영하는 극장은 내게 너무 멀었다. 미안하게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신인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는 비평가 주간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토퍼 보에의 <재구성>을 보지 못했다…(비통한 어조로) 유감이다.

이 추접하고 음란한 늙은이야

<오고, 가며>(Vei e vem) 감독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 비경쟁 공식초청작

나는 호이오 세자르 몬테이로가 위대한 시네아스트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상하게 그냥 찍으면 그 스스로 기적처럼 영화의 숭고한 순간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가 그런 사람이다. 또는 에릭 로메도 그러하다. 여기에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를 더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냥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호이오 세자르 몬테이로는 추접한 늙은이이며, 허망한 망상에 젖어 있는 영감쟁이다. 그는 여성의 음모(陰毛)에 아주 깊은 관심이 있으며, 하루종일 섹스에 관한 생각에 몰두해 있으며, 젊은 여자만 나타나면 하여튼 잘 궁리만 한다. 얼마나 그러고 싶어하냐면 자기 영화에 자기가 직접 주연으로 나와서 젊은 여자들과 침대에서 뒹군다. 그러나 그건 그의 마음일 뿐이다. 정작 그 앞에 젊은 여자가 나타나서 발가벗고 그와 함께 눈이 시릴 만큼 하얀 시트 안에 들어가서 애무를 해도 그의 늙은 육신은 이미 발기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육체와 눈부신 피부 앞에서 이제 막 생명이 꺼져가는 주름투성이의 육체, 그 위에 내려앉은 죽음의 꽃이라는 검버섯들, 경련을 일으키는 손놀림, 그리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는 거의 꺼져가는 생명의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침대 위를 뒤져서 찾아낸 여성의 음모를 쥐고 그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을 때 거기서 보는 삶에 대한 애처로운 집착은 불현듯 기묘하게도 죽음의 문제를 피하고 싶은 가련하면서도 필연적인 순간에로 이끌고 간다.

몬테이로가 유치하게도 흡혈귀 노스페라투의 분장을 하고 종종 나타나는 까닭도 ‘하여튼’ 죽음과 싸우고 부활을 하고자 하는 그 안타깝고도 절망적인 몸부림이다. 몬테이로는 말 그대로 영화의 파우스트이며, 괴테적 비전과 보르헤스적인 구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서 자기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온 괴인(!)이다. 그런 그가, 영원히 죽음과 싸울 줄 알았던 그가, 그만 영화를 만들다가 지난 2월, 6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고, 가며>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다. 그것도 아주 위대한 레퀴엠이다.

칸에는 죽어서 사람이 오지 못하는 전통이 있다. 86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이 칸에서 상영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2003년 우리는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 없이 그의 영화 <오고, 가며>를 쓸쓸함을 참아가면서 보아야 한다. 그는 이미 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었다. 닥쳐오는 죽음과 언제까지라도 마주 싸우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삶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신과의 내기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몬테이로가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이를테면 그의 <신곡>이나 <신의 결혼식>에서 보여준 저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상상력들이라니!). 그리고 그가 남긴 <오고, 가며>가 정말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걸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세 부부(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 자신!)는 감옥에 간 아들만 빼고는 친척도 없이 큰 집에서 유유자적하게 혼자 산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100번 버스를 타고 그냥 동네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공원에 앉아 있다가 집에 오는 것이다. 집에 와보니 가정부 광고를 보고 한 여자가 찾아왔다. 호세 부부는 그녀를 공주처럼 떠받들면서 청소와 빨래는 자기가 하고, 오직 그녀를 즐겁게 해주는 일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고, 새로운 여자가 온다. 그녀는 호세를 기쁘게 해줄 만한 이유가 있다. 바지를 벗으니 그녀의 음모는 앞뒤로 긴 머리처럼 치렁치렁하다. 호세는 항문섹스를 하다가 그만 상대가 그에게 너무 큰 딜도를 들이미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진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공원에 앉아 있다. 영화는 거기서 갑자기 끝난다. 에필로그는 호세의 부릅뜬 눈이 언제까지라도 감을 것 같지 않은 롱테이크이다. (<눈(眼) 이야기>를 쓴) 조르주 바타이유가 보았으면 뛸 듯이 좋아했을 마지막 장면.

물론 <오고, 가며>의 마지막 장면은 더 남아 있었지만, 몬테이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시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장점도 있다.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스타일의 몬테이로 영화답게 모든 장면은 롱 테이크로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래서 2시간57분에 이르는 이 영화는 고작 58숏에 불과하다(<오고, 가며>는 칸에서 단 한번 시사를 가졌으며, 이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다시 복기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없이 반복될 것처럼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호세의 동네 여행길. 또는 녹색의 공원에 앉아서 하염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호세의 눈길. 의도적으로 카메라는 멈춰 서 있으며,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호세는 그 중심에 앉아 있거나 상대와 마주보면서 대칭 구도로 바라본다. 실내에 들어오면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빛이 그 어딘가에서 실내로 스며들고, 그래서 세상의 또 다른 바깥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그 장소에서 언제까지라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백을 하거나, 철학적 담론을 펼치거나, 음담패설을 나눈다. 호세 부부는 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거나 때로 그림자 속에 죽어가는 자신의 육신을 숨긴다. 그러나 빛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세상에 형상을 일깨워준다.

<오고, 가며>는 말 그대로 숏이 시작하는 순간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숏이 끝날 때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이 지나가는 것이다. 그 숭고한 세상에서 호세 부부는 가정부에게 경찰 옷을 입혀놓고는 그의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시를 낭송한다. 그때의 호세는 음유시인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마조흐라도 된 것처럼 페티시즘에 심취한 채 언제라도 채찍에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노인이다. 또는 10분도 넘게 약이름을 낭송하듯이 암송하는 장면의 안쓰러움. 혹은 저 위대한 27번째 숏. 거기서 호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공원을 맴도는 소녀의 자전거를 따라서 힘겹게 한 바퀴를 뛴다. 그 순간 세상 속의 한줌 같았던 호세를 주변으로 마치 예정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공원 안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프레임 안과 바깥으로 오가면서 제 자리에 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고 빠져나가는 기적과도 같은 10여분, 그리고 벨라 차오의 오페라 아리아. 이 모든 장면에서 숏은 한번 시작하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고, 카메라는 그렇게 힘겹다는 듯이 멈춰 선다. 몬테이로는 그 무엇이건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움직임 속에서 행여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 신기한 영화. 그래서 누구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조스캥 데 프레의 미사곡이 흘러나올 때 이제 우리 곁을 떠나간 저 음란하고도 추접한 늙은이 몬테이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아쉬워할 것이다.

왕가위와 차이밍량의 빈자리

<자줏빛 나비>(紫胡蝶, Purple Butterfly), 감독 로우예, 경쟁부문

<로빈슨 표류기>(魯賓遜漂流記, Robinson’s Crusoe), 감독 린청셩, 주목할 만한 시선

올해 칸에는 왕가위와 차이밍량이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로우예와 린청셩이 왔다. 이건 이들을 비웃는 말이다. 왕가위와 차이밍량은 그들의 영화를 발명한 이름이다. 자기의 방법으로 사유하고, 자기의 스타일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자기의 화법으로 주제를 감싸안는다. 화어권영화들은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하지만 <자호접>과 <로빈슨 표류기>는 그 덫에 걸려들었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 뛰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로우예는 포스트 ‘천안문’ 세대에서 지아장커의 반대 이름이다. 그는 스타일에 심취해 있으며(그의 두 번째 영화 <수쥬>의 첫 장면을 생각해 보라!), 장르영화 안에서 사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영화의 영토를 상하이라고 생각하는 시네아스트이다(그의 고향이 상하이다. 그는 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상하이를 다루는 중국영화들의 대부분은 가짜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상하이는 중국의 모든 시네아스트들이 결국에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향수의 도시이다. 첸카이거의 <풍월>, 장이모의 <상하이 트라이어드>, 허우샤오시엔의 <해상화>. 화어권영화의 대가들은 거기서 추억과 역사를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로우예는 고향을 말하려고 하는 중이다. 그가 현대의 상하이에서 인어에 관한 동화를 히치콕(의 <현기증>)을 빌려 이중 삼중으로 뒤섞은 포스트누아르 <수쥬>에 이어 1930년대 상하이를 다룬 <자호접>으로 돌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