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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럼 2003에서 발견한 감독들 [4]
이영진 2003-06-05

말 없는 카메라 진짜를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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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나와 부엉이>의 박경태 감독

자, 문제 나갑니다. 거기, 바쁜 걸음 하시는 분들도 잠깐이면 됩니다. 여기, 한번 봐 주세요. 맞추면 이 영화, 거들떠 안 보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기지촌 여성들이 미군들의 화대 떼먹기에 항의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칩시다. 당신은 이 경우, 이들 여성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뭐라구요? 매춘은 불법인데 무슨 소리하냐구요? 아, 그런가요. 예? 요즘은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로 바뀌었으니 별 신경쓸 것 없다구요? 역시 다들 법에 밝으시고, 시사에 밝으십니다. 하지만 삐∼. 다들 이 다큐멘터리를 보셔야 할 것 같네요. 입장은 이쪽으로. 특히, 금방 고함 지르신 분들! 벌칙으로 가족 동반 관람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여인을 보셨나요? 인순이 아줌마. 후덕한 인상의 50대 여인이다. <나와 부엉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첫 장면. 상대를 쥐었다놓았다 하는 입심과 넉살은 최상급이다. 간간이 재롱까지 부리니 두레방에서 인기가 그만이다. 하지만 비오는 날이면 그녀는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미군기지인 캠프 스탠리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흥정을 벌인 끝에 자신의 육체를 내놓지만 미군들은 단돈 몇만원을 떼먹는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어디선가 소주 3명을 들이붓고서 두레방을 찾아 엉엉 운다. 박경태(28) 감독이 인순이 아줌마를 만난 건 2000년 봄. 선배의 소개로 찾아간 경기도 의정부 고산동의 상담소 두레방에서였다. “마음 씀씀이는 넉넉했지만 만취하면 식칼을 들이대기도 한다”는 아줌마에게 “좀처럼 다가가지 못했던” 그는 두레방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지촌 여성들의 미술 치료 과정을 카메라로 들여다보면서 그녀의 “선한 눈망울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찍을지 막막했는데 몇 차례 촬영이 진행되면서 카메라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따지고 보면, “나, 그림 그리는 거 찍어!”라며 살갑게 다가온 인순이 아줌마가 감독인 그를 찜한 셈이다.

나는 침묵한다, 고로 그들이 존재한다. <나와 부엉이>는 묘한 다큐멘터리다. 감독이 좀처럼 개입하지 않는다.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레이션만 몇 차례 반복될 뿐이다. 심지어 몇몇 기지촌 여성과의 인터뷰 장면에선 두레방 식구들의 통역(?)을 통해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기지촌에서 월세 20만원 하는 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장벽은 여전했다.” 신뢰를 쌓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면 그는 오히려 자신이 최대한 빠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인공으로 염두에 뒀던 한 여성이 촬영을 거부한 것도 작용했다. “포기할까 망설이다 두달 만에 다시 촬영을 재개했다. 그런데 질문을 못하겠더라.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어서. 오죽했으면 카메라 앞에 선 분들이 이렇게 해줄까 저렇게 해줄까 그랬다. 지금 보면 감독은 어리버리하고 카메라는 소심하기 짝이 없다. 형식도 산만하고. 인순이 아줌마의 흡입력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 연출자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나와 부엉이>는 카메라가 침묵하는 순간,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일례로 인순이 아줌마가 토해낸 강렬한 색감의 그림을 응시할 때는 굳이 역사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녀(들)의 상처투성이 삶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영상 찌라시는 싫다! 올해 2월 완성한 뒤 두레방에서 첫 시사를 가진 날. 인순이 아줌마는 “비참할 것 같다”며 끝내 자신의 모습이 담긴 기록과 마주하기를 거부했다. 박 감독은 “예상은 했지만 적잖이 당황했다”며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삶을 선택해보지 못한 분이다. 거부도 자기 의사표시니 좋은 것”이라는 심리치료사의 말을 듣고서야 한시름 놓았다고 한다. “메시지를 위해 소수자들을 증언자로 내세우는 영상 찌라시는 싫다”고 단호히 말하는 그는 현재 동국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강경대 열사 10주기 기념 다큐 제작에 참여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다큐이야기’ 회원으로 활동해온 그는 이번 작품을 ‘첫 경험’으로 여긴다. 이전에 <북한산을 그대로 두라> 등을 연출했지만, 장편 다큐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존경하는 감독은 박기복. <냅둬!>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등에서 “이질적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에 친밀감을 불어넣은” 그의 카메라를 따르고 싶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의뢰받은 혼혈아 실태 조사가 끝나면 곧바로 이를 소재로 새 작업에 들어갈 예정. “조사 작업을 같이하는 친구가 혼혈인데 미국에서 살며 겉으로 봐서는 네이티브 같다. 그 친구와 나, 그리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았던 또 한명, 이렇게 세명의 서로 다른 의식 구조를 이미지화해보고 싶다”는 그는 이론과 영상을 고루 섭취해가는 보기 드문 신예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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