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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파 프롬 헤븐>의 금지된 사랑을 고민하다
2003-06-04

가능하면 오지 마라, 새로운 사랑아

한 10년 된 이야기인 것 같다. 이른바 고품격 주부생활잡지에서 명사 부부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사회생활도 가정생활도 이렇게 잘 나가요’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어느 날 사단이 났다. 기사가 나간 부부의 남편과 부인의 여동생이 ‘각별한’ 사이라는 이야기가 들어온 것이다. 알고보니 소문은 벌써 동네 안에서는 퍼질 대로 퍼져 있는 상태였는데 불행히도 담당기자와 매체 관계자만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몇달 뒤 부부는 기자가 보란 듯이 이혼했다고 한다. 이해가 안 됐던 건 그 ‘특이한’ 연애사보다 인터뷰 사실이었다. 인터뷰 거절한다고 직장에서 잘리거나 해외추방이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설 이유는 뭔가. 명사들의 삶이란 이다지도 고달픈 것인가. 대단하군.

<파 프롬 헤븐>에서 캐시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물론 캐시는 인터뷰 당시 남편의 ‘비밀’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한국의 명사 부부의 위선적 태도와 자신을 비교하는 게 억울할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항변해봤자 실제인물은 아니니 신경 안 쓰기로 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금지된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는 감상이 단순해진다. 수준이 낮아진다. 그러지 말라는 것. 이유 또한 후줄근하다.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하면 언젠가 네 눈에도 피눈물난다(아, 표현의 후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불붙은 사랑의 유효기간보다 난데없이 폭탄맞은 인간이 받는 상처의 유효기간이 길다는 건 누구에게도 남는 장사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 아니겠어?’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평소에 교통질서 잘 지키고 무단횡단 같은 건 하지 말라는 거 아닌가.

그런데 <파 프롬 헤븐>을 보면서는 “너네 왜 그러니. 이러나저러나 인생 뾰족한 수 없다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근 인물들의 감정묘사가 탁월하다거나 화면구성이 빼어나서라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아마도 프랭크와 캐시의 작업에 동성애와 인종문제라는 ‘정치적 감각’을 요구하는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프랭크가 쭉쭉빵빵한 비서와 ‘놀아나’고, 캐시가 프랭크의 동료와 ‘눈이 맞았다’면 아무리 절절하게 그렸다 한들 “왜들 이러셔, 고만 하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놀아났다’거나 ‘눈이 맞았다’ 하고 표현해서는 안 될, 뭔가 존재의 결단 같은 게 결부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나의 얄팍한 눈치보기 탓이다.

언젠가 소개팅 전선에서 분투할 무렵 누군가 외국인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한 친구는 “혹시 흑인이면 꼭 잘돼서 결혼해야 돼.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어”라고 농담을 하며 낄낄거렸다. 이건 노골적인 인종차별보다 더 고약한 장난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약속이 흐지부지돼서 어쩌면 나의 배우자가 될 뻔했을 누군가가 백인이었는지 흑인이었는지 확인은 못했지만 아마 흑인이 나왔더라면 나의 어딘가에는 배어 있을지 모를 거부감과 ‘정치적 올바름’의 의지에서 나오는 과장된 호의 사이에서 헤맸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사랑에는 인종이나 계급 따위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감독은 부부가 각자 빠진 사랑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동성애나 인종문제를 끼워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50년대의 억압적인 사회규범을 부각시키고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이런 장치를 넣었을 게다. 그러나 어쨌거나 ‘사랑’이란 건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일 터인데 나는 10년 이상 훈련받은 윤리적 태도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느라 솔직히 ‘사랑’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만약 여비서나 남편의 (백인)친구와 사랑에 빠졌다면 내가 이처럼 그 사랑을 순연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겠는가, 그것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벽이 높을수록 사랑도 더 훌륭해지는가 하는 반편향적인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프랭크의 경우 참고 사는 건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터이니 “돌아와”라고 말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을 포기한 캐시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부르주아적 삶으로의 안주라고 비난한다면 “너 잘났다”고 대꾸해주고 싶다. 그의 남은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겠지만 떠났다면 또 무어가 그리 행복했겠는가. 새로운 사랑이 다가올 때는 언제나 남은 사랑(그것이 배우자이건 자식들이건 그 밖의 주변 사람들이건)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갈수록 꼰대화돼가는 요즘 나의 생각이다.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