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젤라즈니 지음 | 김상훈 옮김행복한 책읽기 펴냄 | 1만1천원
로저 젤라즈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기 소설이 <신들의 사회>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쓴 어떤 소설보다도 많은 노력을 들였고, 야심에 걸맞은 결과를 얻었다”고 똑같이 사랑스러울 작품들 중에서 굳이 이 소설을 택한 이유를 밝혔다. 1960년대 SF소설의 뉴웨이브를 개척한 그룹의 일원이었던 젤라즈니는 고작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신들의 사회>를 썼다. 작가가 된 지 5년 만에 정점에 올라서버린 그는 9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작품을 뛰어넘지 못했지만, <신들의 사회> 어디에서도 젊은 작가의 섣부른 야망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 행성의 미래사회를 거대한 힌두신화와 맞붙여놓은 <신들의 사회>는 태초의 전투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낳은 현재, 태양이 얼굴을 돌릴 만큼 세차게 흐르는 피로 얻어낸 미래를 망라하고 있다.
<신들의 사회>는 샘 혹은 마이트레야, 이 소설의 원제(Lord of Light)이기도 한 ‘빛의 왕’이라 불리는 사내가 영혼이 파장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먼 ‘신들의 다리’ 너머에서 불려오는 순간 시작된다. 그는 이 행성을 개척한 ‘1세대’의 일원이었다. 그 동료들은 고향 우라스에서 가져온 신화를 차용해 신의 자리에 앉았고, 자손들을 무지한 상태에 머물도록 강요했지만, 샘은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육체를 바꿔가며 세상을 떠돌아왔다. ‘1세대’는 과학기술을 무기삼아 영혼이 다른 육체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육체를 택하며 하늘에 머물고, 후손들에겐 그것이 윤회라고 설명한다. 이 신권사회에 염증을 느낀 샘은 불교의 교리를 빌려와 자손들에게 신들을 향한 반역을 꾀하도록 지도한다. 그 끝은 인간과 행성 원주민의 연합군이 도발한 참혹한 전쟁이었다.
<신들의 사회>는 샘의 부활에서 시작해 그 과거를 서술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복잡한 형식을 취한다. 창조신 브라흐마, 파괴의 신 시바, 죽음을 부르는 여신 칼리를 알지 못하는 서구 독자들에게 이런 형식은 낯선 신화와 더불어 혼란을 부르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젤라즈니는 SF와 신화에 머물면서도 자신의 길이 현재를 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는 대표작 중 하나이며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무대로 삼는 <앰버 연대기>가 “현실을 언급하는 소설”이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과학기술이 가르는 계급의 구분, 지식을 요구하는 인간들의 몸부림, 신들이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진보는 공간만 다를 뿐, 60년대 사회가 안고 있던 고민거리였다.
젤라즈니는 SF에 언어와 기호학을 도입한 새뮤얼 딜레이니, 페미니즘과 계급에 관심을 가진 어슐라 K. 르귄과 같은 시기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들 뉴웨이브 세대는 SF가 공상이나 테크놀로지의 발달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향한 분명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젤라즈니는 “다른 작가들이 북구와 켈트 신화를 즐겨 쓰기에, 조금 다른 것을 하고 싶어서” 동양 신화를 골랐다고 말했지만, <신들의 사회>와 그의 다른 소설들은 스펙터클한 묘사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신들의 사회>는 SF소설 시리즈를 기획한 출판사 행복한 책읽기의 SF총서 중 한권으로 출판됐다.김현정 para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