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나리오는 대가를 만나면 좋은 영화로 빛을 발하지만 그 어떤 대가도 좋지않은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순 없다.”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과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특히, 감독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유착관계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해보자! 한국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산다는 것은 고행하는 수도승의 모습이 아닐까! 검증된 10여명의 작가들(영화화된 시나리오로 어느 정도 흥행이 담보된 작품을 써낸 작가들) 외에는 시나리오 가격도 널을 뛰고, 무수한 각색과정에서 원작과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시니리오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전무한 상태이고, 그 대안 모색이 시급한 현실이다. 내가 존경하는 송길한 선생님이나 지상학 선생님처럼 다방면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일정한 퀄리티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를 비롯한 요즘 작가들은 거의 다 특정 개인기를 앞세우기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한 것이다.
일단 작가의 연령이 대폭 어려졌다. 주관객층인 20, 30대의 사고와 트렌드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변명 아래 선호하는 작가들도 20, 3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나리오 소재의 부피는 늘어났으되 깊이는 점점 상실되어가고 있고, 작가는 많이 있으되 검증된 작가는 별로 없다고 주변에서는 떠들어댄다. 여기에 난 반론을 편다. 실제로 영화에 맞는 작가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찾아보았을까?(나 같은 마당발도 우리 작가후배들을 많이 파악하고 있지 못한데…) 기획실 또는 프로듀서, 감독들이 찾아내는 작가들은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는 기성작가나 전에 작업을 같이 해 본 작가들의 알음알음을 통해서 작업을 맡긴다. 그 작가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하지도 시나리오와의 궁합도 고려하지 않은 채! 한 작가에게 작게는 초고에서 4고까지 많게는 10고가 넘는 책을 뽑아내면서 작가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놓고, 또 다른 작가를 찾아 헤맨다. 또 다른 작가가 찾아지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여기에서 낭비되는 사간과 돈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다행히 영화가 되는 작품도 원작이나 처음 작업했던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국적불명의 시나리오가 탄생되기도 한다(작가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로 시나리오 작가는 생활고에 시달린다. 특급작가로 분류되시는 지상학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영화 시나리오만 가지고는 작가가 결혼해서 애들 키우며 살아가기 힘들다. 물론 네임밸류가 있는 작가들은 제작에 직접 참여하여 자기 몫을 챙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이고, 1년에 3편은 써야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데 3편 쓰기도 힘들 뿐더러 그것들이 영화화될 확률도 적고 잔금까지 받는 것도 쉽지 않다.” 특급작가가 이럴진데 그 밑에 있는 작가들은 오죽하겠는가!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기에 좀더 효율적인 방법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작가도 이제는 메니지먼트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술자리의 후배작가 말처럼 “배우보다도 일을 뚫기가 더 어려운 저희들에게 매니지먼트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가슴이 메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시나리오 작가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 상황! 이것이 현실임에야! 좀더 정확하고 현실적인 표준화된 작가료와 작품과 좀더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들을 찾아서 궁합을 맞추어주는 일! 이런 정보들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 선배로서 나의 몫처럼 느껴진다. 주변의 작가들부터 챙겨봐야겠다(소주값은 매니지먼트 비용에서 충당할까!). 김해곤/ <파이란> <블루>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