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네 멋대로 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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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장르 유희 6편
독립영화가 장르영화의 반대편에 있다고? 하지만 영화의 역사에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해온 장르영화를 제쳐놓고 영화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인디포럼 2003의 영화들이 장르를 고민하는 방식은 남다르다. 전형적인 장르의 틀을 가져오지만, 이내 이를 제멋대로 해체하고 재조립해 기묘한 세계를 창조해낸 것. 과감하게 장르 파괴, 또는 장르 가로지르기를 시도한 영화들을 조명한다.
<기억의 환(幻)> | 이난/ 16mm/ 흑백, 컬러/ 36분/ 2003년/극·실험
미스터리스릴러의 틀을 빌려와 황당하게 뒤틀어버린다. 탐정 김군은 어느 날 민전이란 조직에서 활동했던 여몽이란 남자와 애인 미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사방을 뒤지며 탐문을 벌이던 김군은 라디오 뉴스에서 여몽이 몽산포해수욕장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여몽의 실종, 살해에는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부터 차용해온 미스터리란 틀은 코미디로 전화되기도 하고, 판타지로 튀어나가기도 한다. 역사에 대한 기이한 시선이 엿보이는 독특한 작품.
<미안합니다> | 박명랑/ DV6mm/ 컬러/ 33분/ 2002년/ 극·실험
한 남자의 복수극이라는 심리스릴러의 틀 안에서 사회적 증후군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작품이다. 번역을 본업으로 갖고 있는 30대 남자는 오랜만에 외출을 한다. 버스 안에서 한 고등학생으로부터 폭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저항하지 못한 채 내리고 말지만, 이내 분노가 치밀어올라 복수를 준비한다. 그 복수란 다름아닌 학생으로부터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를 듣는 것. 그는 스토킹에 가까운 추적을 벌인 끝에 학생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고 집요하게 전화해 사과를 받아내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다. 마침내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시종일관 주인공 남자의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이 영화는 한 소심하면서도 편집광적인 인물을 통해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강박증을 갖고 있는 현대인의 초상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밀리터리 탱고> | 황종원/ 디지베타/ 흑백/ 17분40초/ 2002년/ 극·실험
코미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작품. 주인공 섹시맨은 싸움을 잘하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춤을 배운 고등학생. 학교에선 소문난 왕따지만, 동급생들이 그를 괴롭힐라치면 힘센 선배 쌈마이가 도와준다. 원래는 춤을 배우고 싶었지만 동네에 무도회장이 없어 주먹질만 익혔다는 쌈마이는 섹시맨에게 노골적인 애정공세를 펼치지만, 섹시맨은 그런 상황 자체가 싫다. 어느 날 교련시간, 백병전을 실습하던 쌈마이와 섹시맨은 탱고를 추게 되고, 이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발전한다. 남성성과 동성애를 동시에 조명하는 색다른 퀴어영화이기도 하다.
<보지> | 이상철/ 16mm/ 컬러/ 19분20초/ 2003년/ 극·실험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상역사 액션멜로영화. 이 영화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전두환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경제-군사적으로 대국이 됐고, 이에 저항하는 ‘노랑혁명단’이 국가의 기지를 폭파하기 위해 잠입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 조직의 리더인 장은 한때 함께 구호를 외쳤던 전 애인 미주의 총구 앞에 놓여 있다. 죽음 앞에 선 장은 미주에게 “나 사랑했었니?”라고 묻는다. 미주가 흔들리는 사이, 동료인 여성조직원이 그녀에게 총알을 발사한다. 뜬금없이 슈퍼맨이 등장하거나 장르영화의 클리셰를 비꼬는 등 키치적 냄새가 물씬하다. 마지막의 반전 또한 즐겁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그저 웃자고 보기에는 그 시대적 환기가 예사롭지 않고, 진지하게 보기엔 좀 경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
<기억의 환(幻)>
<제목 없는 이야기> | 김진곤/ DV6mm/ 컬러/ 23분/ 2003년/ 극·실험
보기에 따라 역사어드벤처일 수도, 코미디일 수도 있는 독특한 구성의 영화.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상대에게 질문을 던진다. “김구 선생의 안경은 원래 다른 사람 것이었는데, 누구 거였게?” 김구의 안경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이토 히로부미를 거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후쿠자와 유키치, 구텐베르크, 헤겔을 거쳐 정약용으로 흘러간다. 도무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는 야사(野史)의 숲을 경쾌하게 누비며 영화는 막판의 유쾌한 반전을 준비한다. 한 남자가 줄줄이 늘어놓는 이야기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역사는 거대한 맥거핀이자, 별 소용없는 지식-권력의 전유물로 드러난다.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part1, 2> | 성호/ DV6mm/ 컬러/ 40분/ 2003년/ 극·실험
유쾌발랄한 혼성장르영화. 극과 다큐의 중간쯤에서 가볍게, 그리고 환상적으로 유영하는 매우 즐거운 작품이다. 영화감독인 ‘나’는 꿈에서 마이클 구다사이라는 영화감독이 영화 만드는 것을 보며, 그 꿈 안에서 마이클 구다사이는 또다시 샴쌍둥이에 대한 꿈을 꾸고, 샴쌍둥이는 중산층 가정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이러한 꿈 사이의 경계는 쉽게 허물어지며, 곧잘 삽입되는 다큐 화면은 이를 더욱 모호하게 한다. 하지만 언뜻 복잡해 보이는 구조에 관해 고민할 틈도 없이 영화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흘러간다. 일본어, 영어 학습테이프의 ‘가짜 내레이션’과 엉뚱한 자막이 불일치되면서 폭소가 터지고,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까지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유희적 성격은 강화된다. 자기반영적 영화이자, 현실 속의 판타지를 보여주는 영화. <반변증법>의 김곡, 김선 형제도 출연한다. 문석 ssoony@hani.co.kr
영화의 미래를 실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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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체! 실험영화 4편
영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실험영화는 오랫동안 독립영화 고유의 영역이었다. 상업영화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탐험하는 실험영화는 내일의 영화를 예감하게 하는 일종의 나침반 구실을 해왔다. 한동안 침체를 겪던 실험영화 작품이 올해 들어 다수 출품됐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새로운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생각하는 만큼 보이지만, 스크린상 이미지만으로도 즐길 수 있는 실험영화 세계로의 여행.
<위상동형에 관한 연구> | 김동명/ DV6mm/ 컬러/ 24분/ 2003년/극·실험
인디포럼 2003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전반부에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침대 위 세 형상들에 관한 연구>를 모티브로 삼았다. 세 조각으로 분할된 그림처럼 영화는 세 가지의 시공간을 비추며 존재의 조건을 탐색한다. 인간을 탈육화된 잔혹한 이미지로 묘사하기로 유명한 베이컨처럼 이 영화 또한 간혹 엽기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곳곳에 등장하는 베이컨 특유의 살과 뼈의 이미지는 육체와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살아 있는 육체와 구더기가 들끓는 고깃덩어리의 대비는 공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베이컨에 관해 들뢰즈가 적은 <감각의 논리>만큼이나 난해한 이 영화는 존재의 본질에 관해 근원적인 질문을 ‘위상동형’이라는 복잡한 수학 개념에 빌려 표현한다. “수직이나 우위가 아닌 위상동형적인 삶의 공간과 그 안에 존재하는 ‘나’를 증명한다”는 것이 감독의 의도. 영화 중간 등장하는 고깃덩이를 뒤집어쓴 사람의 형상은 베이컨의 또 다른 작품인 <고깃덩어리에 둘러싸인 머리>를 연상케 한다. 김동명 감독은 김곡, 김선 감독의 <반변증법>에서 조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나쁜 여자의 최후> | 위준석/ 16mm/ 컬러/ 10분/ 2003년/ 극·실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독특한 구성으로 담아냈다. 영화 속 화자의 어머니는 5년 전 쓰러져 죽음을 기다려왔다. 그의 마음속에서 어머니는 5년 전 죽었을 것이지만, 막상 어머니의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자 느낌은 생경하다. “자기 자신은 늘 변하면서도 주위의 모든 것들은 늘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길 바란다”는 영화 속 내레이션처럼 흘러가는 시간과 유한한 육체에 관한 단상이 이상하리만치 서글프게 느껴진다. 어린이대공원, 재개발아파트 등의 다큐멘터리 릴을 이들 이미지와 대조적인 내레이션과 대칭시켜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억측의 문법>
<안피스베나 V. 2.0> | 이정수/ 16mm/ 컬러/ 10분/ 2003년/ 극·실험
극명하게 분열된 자아, 또는 도무지 맞닿을 수 없는 두개의 삶을 보여준다. 안피스베나는 그리스어로 ‘두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신화에서는 양방향으로 가는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가리킨다. 이 존재할 수 없는 상상 속의 동물처럼, 영화는 여자와 남자라는 두개의 분리된 존재가 상반된 양태를 보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억측의 문법> | 이중영/ DV6mm/ 컬러/ 9분50초/ 2002년/ 극·실험
영어제목 <Sleep Learnin*>에서 연상할 수 있듯, 무의식이 해방되는 꿈속의 ‘문법’을 영상으로 담았다. 마구 변주되는 문자들의 조합이나 점멸하는 의식 같은 다중노출된 이미지가 환상 속을 배회하게 한다. 일본 동북예술공과대학 대학원에 다니는 이종영 감독은 “자신 안에 고립된 꿈의 문법과 꿈의 언어. 그 꿈은 지독할수록 편안하다”고 작품의 의도를 드러낸다.문석 ssoony@hani.co.kr
해외 실험영화들과학, 아름다움의 미학
파격적인 형식 그 자체가 내용이 되기도 하는 실험영화는 아무래도 낯선 세계다. 하지만 실험없이 미지의 세계가 열리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디포럼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미디어시티’의 작품 6편을 초청해 상영한다. 미디어시티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도시 윈저에서 매년 2월에 열리는 국제실혐영화제. 추상파 미술 양식과 초기 기하학적 영화의 방식을 인용한 수학적 그래픽 작품인 , 황폐한 수도원에서 금빛을 채취하기 위한 움직임을 잡아낸 <수면을 탐색하는 물>, 어둠 속에서 도시를 보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담은 <글로우 인 더 다크> 등을 상영한다.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띤 <레트로그래드>(크리스토프 켈러, 31분, 1999)다. 1900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베를린 샤리테 병원에서 제작한 필름을 자료로 사용해 만들었다. 특이하게도 이 병원은 영화역사 초창기 부터 지금은 없어진 자체 부설 영화 연구소에서 천여개의 교육용 의학영화를 제작했다. 아이들의 뇌를 실험에 사용한 나치의 과거부터 호르몬요법으로 동성애를 치료하려는 실험까지 자못 충격적인 장면이 툭툭 튀어나온다. ‘과학’이란 이름의 영화에 어떤 미학이 있을까? 한 과학자가 이렇게 말한다. “진짜 미학이 아니더라도 많은 현상이 미학적이죠. 미세한 현상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아름다워요. 중요한 건 과학영화가 진실을 담고 있다는 거죠.”
인디포럼은 또 일본의 실험영화 그룹 FMIC(film makers information center)의 작품 9편을 상영한다. 신화의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담은 <수염(水炎)>, 명확한 컨셉과 미세한 계산을 바탕으로 한 3분간의 여행담 <쓰리 미니츠 아웃>,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감을 날려버려 모든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향> 등이다. <쓰리 미니츠 아웃>에선 한 인물이 들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이나 장소 속으로 계속 이어지는 화면의 정교함이 흥미롭다. 이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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