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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리포트,두 보고서 [5]
이다혜 2003-05-30

유령, 섹스 그리고 로드무비

<브라운 버니>(The Brown Bunny) | 감독 빈센트 갈로 | 경쟁부문

빈센트 갈로는 여기서 내기를 건다. <브라운 버니>는 지나치게 야심적이거나,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작가영화이다. 어쩌면 첫 번째 영화 <버펄로 66>이 지나치게 성공했기 때문에 다음 영화를 만드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또는 캘빈 클라인 청바지 광고 모델이 걸작을 찍었다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빈센트 갈로는 지난 4년 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21세기의 첫 번째 위대한 로드무비 <브라운 버니>를 만들었다(아니, 첫 번째라는 말은 틀릴지도 모른다. 거기에 구스 반 산트의 <게리>를 더해야 할 것이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두 시간의 여행. 혹은 유령과 함께 떠나는 길의 여정. 빈센트 갈로는 여기서 최소 인원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빈센트 갈로 자신이 제작하고, 감독을 하고, 각본을 썼으며, (자막에 의하면) 촬영도 그 자신이 했다. 그리고 자기가 주연이다. 마치 원 맨 밴드영화라고 부를 만큼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해낸 이 영화는 그것이 미학적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정신적인 순간의 ‘열반의 경지’(!)에로 이끌기 위한 기다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분명히 35mm로 찍었지만 마치 8mm로 작업한 것처럼 때로 초점이 맞지 않는 장면이 있으며, 마치 아마추어가 찍은 것처럼 화면에서 등장인물을 놓치거나 홈 비디오처럼 찍히기도 한다. 종종 역광을 찍었으며, 그래서 렌즈 안에 들어온 빛이 거친 입자를 만들기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이지 라이더>를 떠올리게 만들고, 때로는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멀리 나간다. 또는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을 연상케하지만, 그보다 훨씬 말이 없다. 거의 모든 장면들은 롱 테이크로 찍혔으며, 그 안에는 아무런 미장센도 없다. 그냥 텅 빈 화면과 공허한 시간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내야만 한다. <브라운 버니>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 물리적 시간의 고통은 등장인물이 그 자신 혼자이며, 이따금씩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주 잠깐씩 나온 다음에 완전히 사라진다. 두 시간에 이르는 영화 내내 1시간20분이 될 때까지 영화 속 인물은 빈센트 갈로와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뿐이다. 그러니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고 그저 그 여행길에 몸을 내맡겨야 한다.

첫 장면은 뉴햄프셔에서의 모토사이클 레이스 장면이다. 이미 이 첫 장면에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원형 경기장을 빙빙 도는 모토사이클을 아무 사건도 없이 카메라는 멀리서 따라가면서 끝날 때까지 그냥 쳐다보듯이 찍는다. 버디(빈센트 갈로)는 경기가 끝난 다음 그의 250cc 혼다 모토사이클을 밴 자동차에 싣고 뉴햄프셔에서 오하이오를 거쳐 일리노이, 세인트루이스를 지나 캘리포니아까지 여행할 작정이다. 길을 떠나면서 패스트푸드점 아가씨에게 “부탁이니, 제발 같이 떠나자”라고 말하지만, 그녀를 태우고 가다가 2분 만에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냥 혼자서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버디가 가는 길의 풍경을 하염없이, 물끄러미, 지칠 줄 모르고, 그냥 넋을 놓고, 거의 자포자기한 채 바라보아야 한다. 음악도 거의 없고, 대사도 없다. 그저 길을 가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뿐이다. 옛날 친구 데이지의 부모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로 길거리에 서 있는 여자들을 둘러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들과 아무 사건도 생기지 않는다. 또는 그가 왜 캘리포니아에 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40분. 버디는 싸구려 모텔방에 앉아서 데이지가 오기를 기다린다. 카운터에 이야기해서 몇번이고 데이지에게 전화가 오면 연결해달라고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의 전화는 오지 않는다. 지칠 무렵 카메라가 화면을 잘못 잡은 것처럼 한쪽 구석이 비어 있는데, 거기에 유령처럼 데이지(클로에 세비니)가 서 있다. 그리고 둘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포옹하고 키스한다. 버디는 데이지에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하냐고. 데이지는 대답한다. 물론이라고. 그러자 버디가 묻는다. 그런데 왜 나를 떠났냐고. 데이지가 대답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그리고 데이지는 버디의 바지를 벗기고 자지를 빤다. 그냥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오럴섹스라느니, 커닝링구스라느니 하는 말로 바꿔봐야 같은 말이다. 화면은 그렇게 아무런 장식도 없이 정색을 하고 보여준다. 버니의 자지가 발기하고, 데이지는 그걸 입에 넣고 빨아준다. 버니는 다른 놈들하고 왜 섹스를 했느냐고 물어본다. 데이지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몇번이고 대답한다. 그리고 말한다. 자지를 빨아준 건 너밖에 없다고. 섹스가 끝나고 모텔방에 있는 사람은 버디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홈무비처럼 기억이 흘러간다. 데이지는 버디도 있었던 파티에서 마약을 하고 그 파티에 온 남자들과 돌아가면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에서 죽었다. 버디의 마음속의 유일한 여자. 버디의 여행길은 유령과 함께 한 닷새였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것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버디는 그 어떤 사건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는다. 또는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옆에는 데이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버디의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이며, 이 유령과의 로드무비는 마지막 대목에서 심금을 울린다. 죽은 자와 길을 떠나야 하는 자가 바라보는 저 황량한 풍경들. 아무런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이 이어지는 텅 빈 장면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자의 시선. 한마디로 무모한 영화. 그것이 그렇게 이 영화 안에서 사무치게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고독한 자들의 불면의 밤을 위한 영화, 그래서 언제까지라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여행길, 유령과의 동침 끝에 영화가 끝날 때 재빨리 처음으로 되돌려서 다시 처음부터 보고 싶은 영화. <브라운 버니>는 영원히 끝나서는 안 되는 영화이다.

세상에서 제일 간절한 목소리

<오후 5시>(Panj e asr) | 감독 사미라 마흐말바프 | 경쟁부문

스위스에 은둔해서 살고 있는 고다르는 그 늙은 몸을 이끌고 18살의 소녀 사미라 마흐말바프가 만든 첫 번째 영화 <사과>를 보러 옆 동네 영화관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마지막 회를 보고 걸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감동한 나머지 사미라에게 편지를 썼다. 고다르는 사미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은 여러 가지로 읽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미라의 영화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영화이다. 그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항상 그 자리에 간다. <사과>는 테헤란의 거리에서 찍었다. 두 번째 영화 <칠판>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 속에서 쿠르드족의 망명길을 따르면서 이란과 이라크 국경을 넘으면서 영화를 찍었다(우리는 이제 그 국경이 여러 부족들의 긴장관계로 인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 폭격이 이어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강도들이 흥정하고, 소년들은 무리지어서 피난민들을 도둑질한다. 그리고 세 번째 영화 <오후 5시>를 만들기 위해서 그녀의 영화가족들과 주력부대를 이끌고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사미라 영화에서 소년들은 숙제를 하기 위해서 언덕을 넘는 대신 살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미라를 통해서 이란영화는 불현듯 동시대성을 획득했다. 또는 사미라의 영화는 말 그대로 전투적인 영화이다. 그것은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이며, 사미라는 로셀리니의 영화를 오늘 다시 끌어들인다. 또는 사미라 자신의 말을 빌리면 “사타지트 라이와 켄 로치, 그리고 짐 자무시가 자신의 영화 경쟁자”이다. 사미라는 자신의 주인공이 학대받고, 버림받고, 죽어가는 그 자리에 가야만 영화가 된다고 믿는 시네아스트이다.

속삭이는 목소리로, 황폐한 모래언덕을 힘겹게 넘어오는 저 당나귀와 할아버지와 두 여자를 거의 지워질듯하게 희미한 아웃 포커스 망원렌즈로 지켜보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오후 5시, 정확하게 5시에, 죽음만이 남는다.”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노크레는 꿈이 많은 처녀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전통에 따라 살기 바라지만 그녀는 아버지 몰래 여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학교에 나간다. 그날따라 장래 희망을 묻자, 노크레는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일어선다.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나라, 여자는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 나라, 거기서 노크레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런 그녀에게 피난을 다니던 한 청년 시인이 다가와서 용기를 준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서 아마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기다리는 며느리와 손자와 딸 노크레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먹을 것도 없어서 젖이 마른 며느리는 아이가 더이상 울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고향 가는 길은 끝나지 않는다. 그들 위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오후 5시>가 속삭이듯 들린다. 그들은 정말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아니, 고향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미라는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칸타하르> 작업을 도우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여자들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 모흐센이 찍은 <칸타하르>에 이미지는 있지만, 삶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녀는 <오후 5시>를 자기 영화에 등장한 아프가니스탄 여자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모든 등장인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선택했으며, 대사는 그들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오후 5시>를 만들었다. 여기서도 여전히 사미라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동시에 오간다. 노크레가 살고 있는 세상에 사미라가 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장면을 거리에서 찍었으며, 종종 드라마는 예기치 않은 사건과 마주치면서 이야기를 더해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이 무단으로 집에 들어와서 내쫓든지 같이 살든지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고 ‘절망적인’ 배짱을 부릴 때 집주인의 난처함.

여기서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처럼 그저 쳐다볼 뿐이다. 거기에 사미라는 드라마를 붙여나간다. 그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기 위한 드라마.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는 사미라의 메시지이며, 희망이며, 세계관이다. 또는 인물이 살아가고, 숏이 삶을 얻는 집이다. 대부분의 장면은 간결하게 찍었으며, 거의 기교가 없는 편집은 인물만을 쫓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사미라 영화의 함정이 있다. 저 참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사미라의 호소가 노크레의 삶을 감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도 희망의 이름으로 참아야 하는 것일까? 사미라는 그녀와 동갑내기인 노크레 역의 아크엘레 레자이에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전이되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녀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우스꽝스러운 연애극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녀의 사진을 찍어서 거리의 기둥마다 그녀의 얼굴을 알리는 포스터를 붙이며 시인이 ‘정치적 활동’을 할 때,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감상적인 동화이다. 시인은 현실을 아름답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 순간 현실은 아무것도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후 5시>에서 심금을 울리는 대목은 그네들이 집을 떠나서 고향으로 가기 위해 황량한 벌판을 헤맬 때이다. 그러나 그 장면의 이미지가 주는 육체적인 추위와 배고픔의 감각이 보는 우리의 고통으로 넘어오지 않는 것은 거기에 노크레의 고통만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고향에 가야하는 할아버지의 믿음이다. 사미라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23살의 사미라는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들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들의 종교적 선택이 지닌 간절함을 우매함으로 제쳐놓을 뿐이다. 사미라가 자기 또래의 고통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들의 서로 다른 세대의 서로 다른 아픔을 이해하려들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아직도 어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차도르 안의 여성들의 각성을 호소하지만, 그녀들은 세상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미라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노크레는 시인을 만나서, 그 남자의 언어를 통해 자기의 마음을 연다. 그런 의미에서 <오후 5시>는 사미라의 첫 번째 연애극이다. 물론 아주 따뜻하며 몇몇 장면은 매우 아름답게 찍혔다. 또 고향으로 향하는 고통스러운 여정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찍어낸 그 전투성이 주는 진정성의 순간이 느껴진다. 하지만 <오후 5시>는 지나치게 감상에 빠져든다. 물론 사미라에게도 연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연애를 하기에는 삶의 무게와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무거운 곳이다. 그녀는 연애할 장소를 잘못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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