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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함께하면 흥행도 영화도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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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감독은 일반 시사회장을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관객이 어떤 지점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체크하고 있다. 애초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비교해 어떤지, 이런 점을 따져보는 것 같다. 관객에 대한 계산이라는 면에서 난 한참 배워야 한다.” - 씨앤필름 장윤현 대표
관객은 영화를 만드는 데 김유진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다. 그가 영화를 만들면서 어린 스탭부터 비영화인에게까지 온갖 질문을 던지며 모니터링을 하는 이유도 관객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하기 때문이다. “오락성이라는 것에 복종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의 중요한 덕목인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단지…>를 만들 때였다. 데뷔작 <영웅연가>와 <시로의 섬>을 만들 때만 해도 김유진은 “주제의식이 선명하면 관객이 든다”며 “똥폼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두 영화가 잇따라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생각은 서서히 바뀌었다. “<단지…>의 초고는 이윤택이 썼는데, 좀 연극적이었다. 그대로 하려고도 했는데, 마음 어디선가 이대로 가선 관객이 외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몇 차례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쳐 세련된 법정드라마로 방향을 잡았다.”
<금홍아 금홍아> 1995년 | 감독 김유진 | 제작 이태원 | 출연 김갑수 이지은
이런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단지…>는 흥행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약속> 전까지의 그의 작품은 흥행에서 줄줄이 실패했다. 물론 이건 신철 대표의 말대로 “그때까지 흥행의 천운과 만나지 못한 탓”이었을 수도 있다. <약속>은 관객에 대한 그의 꾸준한 연구가 결국 빛을 발한 작품이다(또는 신철의 말처럼 “흥행운이 그를 찾아와준 것”이거나). 그는 애초 마지막 부분의 성당장면에서 관객을 울리기만 하면 이 영화가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제작사 삼성픽처스에서 일했던 노종윤 싸이더스 이사는 “그는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것은 정확하게 가져가는 감독이다. <약속> 때도 불필요하게 모든 장면에서 다 힘을 주고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영화의 모든 장면을 놓고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관객이 편하게 볼 거고, 이런 부분에서 약간 달아오를 거고, 이렇게. 그런 식으로 편하게 찍다가 가장 중요하다는 마지막 성당장면을 찍을 때는 진지하게 돌변하더라.” 관객에게 소구할 수 있는 지점을 향해 힘을 집중한다는 점에선 <와일드카드> 경우도 비슷했다. 제작 전 씨앤필름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놓고 일반인들에 대한 모니터 조사를 했다. 반응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후반부가 좀 약하다는 쪽이었다. 그 결과를 받은 김유진 감독은 모니터 의견을 상당히 반영해 결말부를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영화에서 형사들이 퍽치기 일당에게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모니터 의견을 대폭 수용,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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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하고 초심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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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 흥행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김유진 감독에게 투자하기로 한 것은 그의 연출능력, 특히 선굵은 드라마를 만드는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 싸이더스 노종윤 이사
아무리 관객을 고려하고 젊은 마음을 갖고 장르적 돌파를 한다 해도 영화의 만듦새가 떨어졌다면, 오늘의 김유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유진 영화에 대해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경력을 연극 연출로부터 출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영화나 연극이나 기본은 똑같다. 연기자를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가는 연극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 드라마의 리듬, 호흡, 스피드 역시 연극쪽이 강하다.” 그의 30년 지기인 이춘연 씨네2000 대표는 “연극을 해서 그런지 상업영화를 해도 닭살스런 짓을 안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연극을 했다고 해서 그 모든 게 쉽다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라는 자리가 자신의 작품을 객관성을 갖고 바라보기 참 어려운 직업”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모든 신경과 힘을 작품 안에 쏟아 매몰되다 보니 어설픈 시나리오를 갖고 촬영에 들어갔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란 거다. 게다가 그에겐 뼈아픈 상처가 있다. <금홍아 금홍아>를 만들던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를 들고 크랭크인을 외쳤다. “내 뜻대로 완전히 고치고 들어갔어야 하는데, 찍으면서도 써내려갈 수 있을 거라고 까불다 보니”, <금홍아…>는 그의 연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 됐다. 그 이후로 시나리오에 힘을 배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금홍아 금홍아>에서 <약속>까지 3년, <약속>에서 <와일드카드>까지 5년씩 걸린 것도 몇번씩 작품이 엎어진 탓도 있지만 그만큼 시나리오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1993년 | 감독 김유진 | 제작 이태원 | 출연 신현준 김혜선
김유진 영화가 기본기가 강하다는 것은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약속>과 <와일드카드>에 출연한 정진영은 “감독님은 영화를 찍으면서 연출이나 카메라가 앞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셨다. 배우만 보이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관객 입장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라고 작가적인 욕심이 없겠냐마는 김유진 감독은 “내게 뭐 일관된 어떤 지향점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일단 스스로를 장인으로 위치지운다. “나는 영화를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도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하나의 예술 분야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 안에 또 예술이 있는 건가”라고 자문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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