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네아스트를 만나러, 다시 칸으로!
<밝은 미래>
<엘리펀트>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내 생각으로) 이번 칸에서 폭풍의 핵이 될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빈센트 갈로의 <브라운 버니>에서의 섹스장면이 매우 쇼킹할 것이며, 아마도 지난해에 가스파 노에가 해낸 그러한 스캔들을 올해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칸으로. 어쩌면 나는 다시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마다않는 것은 여전히 영화에 대해 고갈되어가는 내 사랑을 붙들려는 안간힘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이 서간체 글들은 고백이며, 또는 사랑하는 신기루를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이다. 그러니 부디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께서는 구조해달라고 병에 넣어서 띄어보내는 이 SOS 편지를 외면하지 마시라. 당신은 우연히 이 편지를 읽는 것이 아니다. 그 유명한 이야기. 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운명의 순환 속에서 결국에는 이 영화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선 올해 칸 경쟁부문의 명단을 보면 무언가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지난해는 말 그대로 위대한 작가들의 성찬이었다. 오프닝을 연 우디 앨런을 시작으로 크로넨버그, 아키 카우리스마키, 올리베이라, 켄 로치, 다르덴 형제, (어찌되었건) 로만 폴란스키, 키아로스타미, 소쿠로프, 그리고 물론 임권택. 그런데 올해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소쿠로프(올해에 또 다시!)를 제외하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라스 폰 트리에는 예고된 바이지만, (올 것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앙겔로풀로스, 제인 캠피온, 코언 형제, (그리고 놀랍게도) 베리만, 쿠엔틴 타란티노, 에미르 쿠스투리차, 그리고 왕가위(이런!)가 결국에는 도착하지 못했다(이들의 영화가 모두 베니스에 간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게다가 칸에는 지금 ‘약올리듯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스티븐 소더버그, 그리고 왕가위가 함께 만드는 3부작 에피소드 영화 <에로스>가 올해 베니스에 온다는 거대한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구로사와 기요시, 빈센트 갈로, 가와세 나오미, 누리 빌게 세일란, 로우예, 프랑수아 오종이 뛰어들었다(모두 경쟁부문에 첫 번째 입선이다). 그들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름도 있고 싫어하는 이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첫 느낌은 벌써(?)라는 것이었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매년 말로만 전해지다가 드디어 그의 영화를 완성하였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내 생각으로) 이번 칸에서 폭풍의 핵이 될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빈센트 갈로의 <브라운 버니>에서의 섹스장면이 매우 쇼킹할 것이며, 아마도 지난해에 가스파 노에가 해낸 그러한 스캔들을 올해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앙드레 테시네와 클로드 밀레, 그리고 베르트랑 브리에는 자기의 방식으로 프랑스영화의 지난 30년간을 버텨온 이름이다. 좋을 수도 있지만, 이미 본 것들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은 그것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보는 사람은 지루해진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시대의 괴물 같은 시네아스트들인 (사도-마조히즘에 ‘심취한’) 미카엘 하네케와 (여성의 음모에 ‘환장한’)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는 비경쟁으로 초대되었다. 그 대신 당연히 경쟁에서 볼 것이라고 생각한 아르노 데스플레생은 주목할 만한 시선(개막작)으로 온다. 또는 왕샤오솨이, 자파르 파나히, 유릭와이, 무랄리 나이르가 모두 주목할 만한 시선에 포진해 있는 것은 좀 의외이다. 그래서인지 칸은 영화제 전에 온갖 저널에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은 서로 존중되어야 하며, 결코 이 부문이 저 부문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서열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바란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런 인상을 만든 게 누군데? 아 참. 그리고 감독주간에 미이케 다카시의 ‘제목도 괴이한’ <극도공포대극장: 고주(升頭)>가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공포영화가 아니라 야쿠자영화이다.
이러한 선택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우선 위대한 대가들의 영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 그들의 새로운 영화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의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이 즐겁기는 하지만 그들 때문에 영화의 새로운 이미지-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다. 물론 새로운 시네아스트를 발견하는 것은 도박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내기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만일 칸이 대가들의 새로운 영화에만 매달리고, 새로운 시네아스트들의 발견을 두려워한다면 점점 더 영화제는 박물관이 될 것이다. 미지의 영화를 발견할 때 느끼는 흥분은 영화를 향한 젊은 영혼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이건 내가 아니라 앙리 랑글루아의 말이다.
시간여행, 혹은 쇼 비즈니스의 철학
우선 첫 인상. 올해 칸에 도착해보니 온통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포스터의 문구는 (이탈리아어로) “영화 만세!”(Viva il cinema)이고, 모든 카탈로그의 쉬어가는 페이지는 펠리니 영화의 스틸이다. 심지어 칸에서 작정만 하면 (그의 중편영화들을 제외한) 전작을 다시 복원된 필름으로 볼 수 있다. 칸의 설명에 따르면 올해가 펠리니의 사후 10주년이기 때문에 그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한다. 위대한 펠리니. 광대 펠리니. 단 한번도 그 어딘가에 멈춰 서본 적이 없는 펠리니.
모두들 펠리니의 영화를 말할 때 <길>이나, 혹은 <달콤한 생활>, 또는 을 말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펠리니의 영화는 <카사노바>와 <사티리콘>이다. 이 두편에서 펠리니는 그 자신의 바로크 취향의 끝까지 가보았다. 거기에는 넘쳐나는 관능과 그 자신이 심취했던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학 개념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이 호화찬란하게 펼쳐진다(펠리니는 61년부터 정기적으로 장신분석 상담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융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펠리니는 72년에 심지어 융의 생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여자와 남자의 이미지가 가면을 바꿔 쓰듯이 자리를 바꾸고, 세계는 스튜디오 안에 들어와서 가짜로 탈바꿈한 채 그 안에서 출구없는 몸부림을 친다. 때로 그들은 세계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운명의 하인이다. 펠리니는 재빨리 네오 리얼리즘을 버렸으며, 때로는 파졸리니와 베르톨루치에게 역겨움을 불러일으킬 만큼 파시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그 반대로 펠리니의 열렬한 지지자들도 있다. 하지만 칸은 다시 펠리니를 불러들이고 있다. 하필이면 왜 지금? 또는 우리 시대는 펠리니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칸은 대담하게도 올해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책자 앞에 (사진도 없고, 별다른 장식도 없이) 장 콕토의 말을 빌려 슬로건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 그것은 빛을 잉크로 하는 모던한 글쓰기이다.” 영화가 모던한 글쓰기라고? 포스트 모던이 파산 선고를 한 지금에서야 비로소? 또는 글쓰기라니? 왜 알렉산더 아스튀릭의 카메라 만년필론(Camera-stylo)을 다시 끌고 들어오는가? 나는 여기서부터 올해 칸을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다. 칸은 영화를 ‘하여튼’ 작가주의 전통 안으로 다시 끌고 들어오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전히 영화는 작가의 내밀한 영혼을 담는 글쓰기와도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 글쓰기는 빛과 함께 생겨난 일렉트로닉 모더니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새로운 작가들을 발견하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만나고 있는지 눈여겨보는 중이다.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당신이 칸에 가고 싶다면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칸영화제에 단 한편의 한국영화도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한국 기자들의) 기사들이 넘쳐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코미디이다. 칸은 감독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그 나라의 국적에 별로 관심이 없다. 만일 관심이 있다면 이라크처럼 불바다가 되거나, 아프가니스탄처럼 폐허가 되거나, 홍콩처럼 질병이 창궐하는 지경에 이르거나, 또는 9·11 ‘이후’의 뉴욕영화들처럼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때이다. 그러니까 한국-남한영화라는 국적 때문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건 정말 큰일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걸 자꾸만 올림픽처럼 이해하는 것은 영화에 대한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부산영화제에서 그 영화의 국적 때문에 보아야 할 영화를 결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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