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터 칸>
<"남자들의 무리들 사이에서"를 연출하면서>
아르노 데플레생은 이미지로 가득찬 지금의 영화를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미지와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리고 <에스터 칸>에 이은 <"남자들의 무리들 사이에서"를 연출하면서>는 말 그대로 진행형의 영화이다.
모두들 칸영화제의 첫 번째 기사로 제랄 크라브칙의 <팡팡 라 튤립>(Fanfan la Tulipe, 영화제 개막작)을 소개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 관심이 없다. 우선 나는 크리스티앙 자크의 원판 <팡팡 라 튤립>을 프랑스 문화원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보았다. 신나는 기사도 영화. 제랄 필립과 지나 롤로브리지다와의 연애담, 그리고 앙리 장송의 문어체 대사, 무엇보다도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마차와 벌이는 ‘그 유명한’ 활극장면들이 50년대 프랑스 대중영화의 정점이라고 불릴 만하지만, 아뿔싸 나는 그때 이미 이 영화를 사형대에 올려놓고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을 쓴 26살의 영화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무자비한 글을 읽고 난 다음이다.
트뤼포는 이 영화가 그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것에 분개했으며, 이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영화들이 진정한 영화들을 죽이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나는 이 글이 그 당시의 한국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이제는 사라진 70년대 문예영화들의 저 따분한 전통!), 트뤼포에게 전적으로 동의한 나머지 <팡팡 라 튤립>에 대해서 이미 적개심을 안고 사살 확인을 하러 보러 갔으니 당연히 이 영화를 제대로 보았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으며, 아마도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제랄 크라브칙이 두편의 <택시>(2편과 3편)와 <와사비: 레옹 파트2>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완전히 관심을 잃었다. 물론 이 영화가 개막작의 영광을 안은 것은 전적으로 제작자인 뤽 베송의 막후 비즈니스일 것이다.
그러나 더 의미심장한 것은 그 다음날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공식초청 비경쟁으로 상영하는 그 맞대결 구도의 배치이다. 두편의 상업영화. 그러나 한편은 루이 15세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벌이는 시대활극이고, 다른 한편은 사이버공간 안에 들어가 시뮬라크라들과 벌이는 액션활극이다. 역사 속의 서사와 탈역사 속의 서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간여행, 혹은 쇼 비즈니스의 철학. 그대들이 나누는 저 한심한 역사에 대한 철학적 잡담에 나는 관심이 없으니 그대들끼리 계속 즐기시기를.
아르노 데스플레생을 기억하라
나의 첫 번째 영화는 주목할 만한 시선 오프닝인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남자들의 무리들 사이에서”를 연출하면서>(En jouant ‘Dans la compagnie des hommes’)이다. 아르노 데스플레생은 내 생각에 지금 프랑스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이다. 그는 92년 <파수병>으로 데뷔한 이후 오랜 준비 끝에 <나의 성생활, 또는 나는 어떻게 다투는가>로 수학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매우 정교한 시나리오 안에서 퍼즐처럼 얽히는 플롯, 이중의 드라마, 질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조, 다중적인 등장인물들, 프레임과 숏 사이의 개념적인 사건적 관계, 또는 이미지에 대한 다른 장르의 예술들과의 연결 고리들, 그 안에서만 설명되는 미장-아빔의 가시성에 대한 질문들은 영화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다시 질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데스플레생은 프랑스영화에서 쫓아냈다고 생각한 ‘질(質)의 전통’을 다시 끌고 들어왔다. 그는 영화에서 그 모든 것을 영화의 순수성만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이미지에의 매혹을 떨쳐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놀랍게도 교양의 영화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표류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들의 공간은 그저 표면뿐이라고 믿었던 레오스 카락스, 장 자크 베넥스, 뤽 베송이 끌어낸 80년대 누벨 이마주(혹은 영미권에서 ‘시네마 뒤 룩’이라고 부르는) 물결이 자기의 방식으로 상업영화들과 타협하거나 파산하거나, 아니면 고립되는 동안 90년대에 등장한 ‘에콜 드 페미스’가 그들에게 저항하는 방식이다.
아르노 데스플레생, 노에미 르보브스키, 파스칼 페랑으로 이어지는 페미스 영화학교 동기들이 함께 모여 협력하면서 영화를 만든 ‘에콜 드 페미스’ 세대는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데 그 하나는 그들이 영화에 대해서 거의 모든 백과전서적 지식을 동원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을 앞선 세대들이 시네마테크 세대라면, 에콜 드 페미스는 영화학교 세대이다. 이것은 커다란 차이인데, 시네마테크 세대들이 영화 제목과 미학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암송하면서도 정작 영화를 만들어내는 기술의 수사학에 대해서는 장님인 것에 대해서 페미스 세대들은 불신한다. 다른 하나는 자기의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을 영화보다는 다른 예술의 전통 안에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 아르노 데스플레생은 영화를 연극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혹은 그 역을 시도한다.
그가 세 번째 영화 <에스터 칸>에서 영화가 이제 막 탄생하려고 하는 1895년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런던을 무대로 한 연극무대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는 이미지로 가득 찬 지금의 영화를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미지와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데스플레생은 정말 구조로 돌아온다. 그리고 드디어 네 번째 영화 <“남자들의 무리들 사이에서”를 연출하면서>는 말 그대로 진행형의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배우들이 모여 앉아서 희곡 대본 독회를 하는 장면이다. 에드워드 본드의 희곡 “남자들의 무리들 사이에서”를 읽고 있는 이들 모습을 디지털 캠코더를 들고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핸드헬드로 따라붙는다(이 영화를 앞자리에서 보면 큰일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사를 따라서 희곡 독회에서 그냥 영화장면 안으로 넘어온 등장인물들은 그 대사를 그대로 반복한다. 이번에는 영화 카메라가 마치 디지털 캠코더처럼 시종일관 아주 가까이 따라붙는다.
어둠침침한 방. 마치 <대부>의 한 장면이 그대로 넘어온 듯한 실내(데스플레생은 이 영화가 시드니 폴락의 <콘돌>의 오마주라고 말한다). 거기서 레오나르는 아버지를 만난다. 레오나르는 아버지에게 주식을 요구하고, 아버지는 그저 생각해보자고만 대답한다. 그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다. 레오나르는 주식을 자기 손에 넣는 날 아버지 앙리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앙리는 자기의 친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기공장을 하는 앙리는 동업자를 파산시켰고, 레오나르는 동업자의 아들이다. 레오나르는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레오나르의 애인 오필리아는 결국 괴로워서 미쳐버린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라고? 물론이다. 이건 현대의 거대한 기업과 주식 시장으로 옮겨온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야기이다. 하지만 데스플레생은 이걸 마치 음모뿐인 갱스터영화, 액션없는 누아르영화처럼 연출한다. 또는 그러면서도 거듭해서 인물들은 심리적인 갈등의 상황과 맞부딪칠 때 그것을 영화적인 그 어떤 장면으로 돌파하는 대신 마치 강조라도 하듯이, 또는 그것이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곁들이면서 희곡 독회장면으로 몇번이고 돌아온다. 그리고 햄릿이 삼촌을 죽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하는 그 대목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레오나르는 최신 총기를 야외에서 테스트하는 순간 총기 안에 실탄을 넣고 아버지를 겨눈다. 하지만 그는 쏘지 못한다. 그때 그는 나무에서 날아가는 새를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상한 감동의 순간이 있다.
어쩌면 아르노 데플레생(위)의 영화의 아버지는 몰리에르나 라신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네 번째 영화 <"남자들의 무리들 사이에서"를 연출하면서>는 더 연극 안으로 들어온 영화이다.
데스플레생은 거의 모든 장면을 핸드헬드로 따라가면서, 마치 왕가위 영화를 방불케하듯이 액션의 중간부분들을 거리낌없이 잘라낸다. 거기에 몽타주는 없고, 그저 데쿠파주만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데스플레생은 대사에 집중하고, 사건에 매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안과 바깥을 오가면서, 또는 무대와 독회를 번갈아 오가면서, 영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아르노 데스플레생은 좀더 연극적이 되었다. 그는 연극을 통해서 영화를 다시 사유한다. 그에게 영화는 이제 연극 안으로 들어온 빛과 사운드, 혹은 카메라의 운동이며, 서로 다른 두 가지 예술 사이의 시간의 굴곡이다.
어쩌면 데스플레생의 영화의 아버지는 장 르누아르나 샤샤 기트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 거슬러올라가서 몰리에르나 라신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네 번째 영화 <“남자들의 무리 사이에서”를 연출하면서>는 더 연극 안으로 들아온 영화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이전에는 구조의 영화를 만들던 그가 이제는 과정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래서 그 자신의 영화를 열어놓고 있다. 구조를 드러내고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차라리 <루이 14세의 권력장악> 이후의 로셀리니 영화를 따라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데스플레생은 여기서 결론을 맺는다. 그것도 비극이다. 레오나르는 아버지를 떠나서 홈리스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대로 아버지가 죽자, 그는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데스플레생은 그 마지막 순간을 마치 무대처럼 끝을 낸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70년대 B급영화와 연극 사이의 그 어떤 공명(共鳴)의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그것보다는 햄릿 이야기를 영화 장르적인 재해석을 통해서 현대적 비극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에도 숭고한 비극은 가능할까? 데스플레생의 질문이 갖는 핵심은 이것이다. 비극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는 숭고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 데스플레생은 여기서 처음부터 영화의 쾌락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제 영화가 그의 친구들 없이는 해나갈 수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미지만 남은 채 날이 갈수록 텅 비어가는 영화의 황량한 스크린을 구원할 천사를 찾는 것 같다.
영화를 구원하는 것.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나는 칸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앙드레 바쟁이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을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트뤼포가 브레송의 <저항, 혹은 한 사형수가 탈옥했다>를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또는 장 콕토가 트뤼포의 를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카뮈가 안토니오니의 <정사>를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을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세르쥬 다네가 장 외스따슈의 <엄마와 창녀>를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올리비에 아사이야가 호금전의 <협녀>를 보았던 것 같은 순간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지금 볼 수 있을까? 만일 그 희망의 순간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이 머나먼 여행길을 무릅쓰고 칸까지 온단 말인가?(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편집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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