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가 이상하게 꼬이는 날이 있다. 우산을 안 가져왔더니 비가 온다든지 택시 타고 부랴부랴 학교 갔더니 휴강이더라는 경험은 그래도 약과다. 종로에서 뺨 맞았는데 한강에서 몇대 더 맞으면 그야말로 눈물이 핑 돌 지경이 된다.
그런데 이 정도는 잽도 안 되는 기구한 인생이 있다.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만든 <I love picnic>은 저주를 받았다고밖에 생각 안 되는 기구한 팔자의 북극곰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북극에서만 살던 백곰 빼꼼이는 모처럼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첫날의 행선지는 전설의 바위로 유명한 이스트섬. 날도 화창하고 위풍당당한 바위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가 언덕에 오르려고만 하면 바윗덩어리가 굴러 내려온다. 다가섰다 도망가기를 몇번. 결국 그는 거대한 바위에 깔리고 만다.
둘쨋날, 이번에는 바닷가다. 더위에 지친 빼꼼이는 수영을 하려고 한다. 푸른 물에 야자수…. 아, 이제 저 물에 뛰어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가 물에 가까이만 가면 물은 자꾸 저만치로 도망간다. 그러기를 몇번. 이번에도 마가 끼었나보다, 하는 순간, 물은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앗싸! 신난다! 빼꼼이는 저만치에서 달려와 시원한 물속으로 뛰어든다. 하나, 둘, 셋! 풍덩!!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불행은 그를 지나치지 않았다. 웬일인지 완전히 기절해버린 비운의 주인공. 그가 뛰어든 자리에는 무시무시한 암초가 있었던 것이다.
셋쨋날에는 후지산을 찾았다. 모양 좋은 화산이 보이고 날도 선선하다. 그 초원을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문자 그대로 벼락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서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야지, 허둥대는 주인공. 그런데 우산은 왜 이렇게 안 빠지는 거야! 비를 쫄딱 맞으면서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마침내 꺼낸 우산. 그런데 그가 우산을 펴자 비는 그친다. 우산을 펴면 맑게 개고, 우산을 접으면 비가 오기를 반복. 우산이 걸레가 되자 비는 미친 듯이 내리고 급기야 빼꼼이는 번개를 맞아 까만 재로 변해버린다….
<I love picnic>의 저력은 대사 하나없이 사람들에게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점이다. 계속되는 고난에도 굴하거나 화내지 않고 성실하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노력하는 빼꼼이의 자세도 웃음에 한몫한다.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 암초에 부딪혀 완전히 나가떨어질 때의 표정,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살피기 위해 눈치보는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웃지 않을 수 없다. 과도한 동작이나 현란한 색상으로 자기 과시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3D 영상은 편안하다. 2003년 대한민국영상만화대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I love picnic>은 프랑스안시페스티벌과 이탈리아 카툰스온더베이에 초청되는 등 이미 수많은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감독은 <엔젤>로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임아론씨. 사실 <I love picnic>은 빼꼼이를 주인공으로 한 7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세편을 묶어서 만든 단편이다. 2분, 7편으로 구성된 <내 친구 빼꼼>은 현재 SK텔레콤 등에서 애니메이션 VOD와 라이브 스크린으로 서비스되고 있다.
3D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빼꼼이를 주인공으로 한 유아용 장편 <베베의 머그잔 여행(Mug Travel)>을 제작 중이다. 이미 한국문화콘테츠진흥원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작으로 선정됐다고.
제작사의 홈페이지(http://www.rgstudioS.com/)에 가면 <I love picnic>을 비롯해 나머지 4편의 에피소드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자금성과 미국 항공우주국, 뉴욕 등지에서 벌어지는 빼꼼이의 웃지 못할 상황은 계속된다. 미국의 픽사가 귀엽고 작은 전등을 이미지 영상에 집어넣어 강한 인상을 남긴 것처럼 갖은 고난으로 매번 죽어나는 빼꼼이가 머리에 하얀 천사 링을 달고 달려가는 모습을 넣은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이미지 영상 역시 놓칠 수 없는 감각이다.
다시 없을 비운의 주인공을 보면서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빼꼼이가 번개 맞고 까만 재로 변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현실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웃으면서 보지는 못할 것이다. 앗, 그러나… 생각해보니 타인의 불행을 웃으며 즐기는 사람도 정말 있긴 하다.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