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타올라라,힘껏
깡패에게 발목을 다쳐 육상을 그만둔 날라리 고등학생, 모아이 석상을 닮은 싸움꾼과 고자질쟁이 왕따, 초등학생 때부터 설사 때문에 스타일을 구겨온 남학생과 그 약점을 잡고 놀려대는 여학생, 학교 최고의 왕따이면서 클럽 최고의 베이시스트…. 이 살짝 어긋난 인물들이 요네하라 히데유키 단편집 <가라쿠타>(시공사 펴냄)의 주인공들이다. 너무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다. 사실 그 점이 의외다. <풀 어헤드 코코>라는 기상천외한 해양모험판타지를 그린 만화가의 작품이라면 좀더 별스러워야 하지 않았을까?
다섯개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표제작의 제목 ‘가라쿠타’(ガラクタ)는 ‘잡동사니, 한물간 것’을 뜻한다. 중학교 때는 잘 나가던 육상선수였으나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발목을 다친 요시야가 낡은 스쿠터를 타고 버겁게 언덕길을 올라간다. ‘이제 퇴물이야, 달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아직 달릴 수 있어요’라고 소리도 질러보지만, 정작 그는 달리지 않는다. ‘너 중학교 때 단거리 기록보유자였잖아’라고 자존심을 긁는 육상선수 히로키의 도전도 소용없다. 그는 바보 같이 선한 웃음을 지으며 껄렁한 날라리들과 마작을 하러간다. 꿈도, 목표도, 잘하는 것도, 굳이 잘해야 할 것도 없는 시시껄렁한 인생. 너무 일찍 소진해버린 청춘은 스스로를 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옛 여자 친구 마유미가 다시 나타나고, 골동품을 모으는 대머리 카페 주인을 만나면서 죽은 줄만 알았던 빛이 타오른다. 다시 한번 제대로 빛나야 진짜 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 작품 <가라쿠타>에는 작위적인 장치들이 많고, 뒤엉킨 앞뒤를 맞춰나가려는 ‘의도’들이 너무 눈에 뜨이고, 보기 민망할 정도의 촌스러운 대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달리 말하자면 1980년대 청춘물의 재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네하라의 조금 엉성한 데생, 인물 중심의 밝은 톤의 그림, 과장된 헤어와 패션 스타일의 어색함도 그러한 느낌을 더한다. 그런데 오히려 바로 그런 점 때문일까? 우리는 거기에서 분명히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요네하라는 ‘열혈이 소멸된 직후의 가벼운 듯 뼈저린 상처’를 그린 1980년대 청춘물의 정서를 제법 볼 만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지지부진한 표제작 <가라쿠타>보다는 <카페 빈즈> <베이스> 등 1회로 끝나는 단편들이 훨씬 강하고 명료한 매력을 펼쳐낸다. 이야기의 구도는 예상 가능한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주인공들을 빚어내는 독특한 감성은 요네하라의 맛을 분명히 풍겨낸다. 항상 두들겨맞는 왕따면서도 누구에게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요타, 소꿉친구에 대한 애정을 막무가내의 땡깡으로밖에 표현 못하는 유카, 가짜 연애 편지에 수도 없이 당해 진짜 편지를 받고도 무표정하게 던져버리는 츠카마…. 그들의 사랑스러움은 그들의 불완전함에서 솟아난다.
소설가에게 자전소설이 있다면 만화가에겐 청춘만화가 있다. 분명 이러한 선언은 과장된 말이다. 하지만 만화가에게도 소설가만큼이나 자신의 어린 날을 토로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게 사실이다. 다만 만화라는 매체는 그러한 고백을 썩 좋아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판타지 속에 집어넣기를 바란다. 그래서 은 로봇과 비밀기지에 열광했던 소년 시절을 SF 속에, <슬램 덩크>는 공 하나에 매달렸던 학생 시절을 근성의 스포츠드라마에, <오늘부터 우리는>은 하는 일 없이 싸움만 일삼던 청춘기를 학원액션이라는 장르 속에 집어넣는다. 리얼리티를 조금 버린 대신, 영웅의 쾌락을 얻은 것이다. 아다치 미쓰루의 모든 만화의 밑바닥에는 그런 청춘의 도전과 좌절이 깔려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불타는 영웅을 버리고, 극적인 승리의 장면을 만들지 않고, 그저 일상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에서 청춘의 한순간을 그리는 만화들이 존재해왔다. 오카자키 교코가 <제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 <리버스 에지>에서 그랬고, 마쓰모토 다이요가 <푸른 봄>에서 그랬다. 요네하라 히데유키의 <가라쿠타>는 그들만큼 절절하고 뼈저리지는 않다. 캐릭터도 강하고 이야기의 기승전결도 명료하다. 하지만 그 서늘한 서정은 잘 간직하고 있다. 이 만화가 한편으로는 <고릴라 맨> <비바 블루스>와 같은 주먹 잘 쓰는 불량 청춘들의 드라마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지만, 그들과는 또 다른 외곽의 정서를 풍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 모두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겪었을 수도 있다. 다만 아무도 만화로 그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명석/ 만화평론가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