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영화가 없네, 빌어먹을”
젠장, 또 마감시간이 지났다. 오늘은 최악이야. 아, 술이 웬수다. 그렇게 퍼마시지만 않았으면 벌써 마감했을걸 이꼴이 뭐야, 좀비 같은 꼬락서니하고는…. 좀 있으면 지엄하신 심은하 기자님이 싸늘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실 테고 나는 방값 밀린 자취생이 요리조리 도망다니다가 걸린 집주인에게 애걸하듯 쩔쩔매며 한 시간만 한 시간만 빌어대야겠지. 전화를 꺼놓을까? 그래봤자 사무실로 하면 받을 수밖에 없잖아. 아예 부서 전화코드를 다 빼놔버려? …미쳤군.
무슨 영화를 쓰지? 쓸 영화가 없네. 빌어먹을…. 나도 남의 돈 거저 먹으려는 건 아니라구. 지난 주말부터 <엑스맨2>와 <펀치 드렁크 러브> <어댑테이션>, 다 돈주고 봤다구. 근데 어떡해. 그냥 “참 재미있었습니다”가 끝인데…. 애당초 원고료 올려준다고 덥석 이 코너를 받은 게 문제였어. 나에게 지구상의 영화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 두 부류만 존재할 뿐이야. 이런 내가 영화에 대해서 원고지 열장 넘게 주절거려야 하다니…. 아예 그만 쓴다고 통보해버릴까? 그럼 편집장이 얼씨구나 하면서 “그 말 번복하면 절대 안 된다”며 엄포를 놓겠지? 흥, 내 그 꼴은 못 보겠다. 나도 자존심이 있다구…. 자존심은 얼어죽을 무슨 자존심. 원고료 때문이잖아. 그래, 진정하자.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삶의 목표인 주제에 원고료를 포기하는 건 나답지 않은 행동이야. 언젠가 이제 그만 쓰라고 하면 다음번에 잘 쓰겠다고,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니?
차라리 허문영 편집장이 권한 대로 을 쓸까? 음… 생각할수록 열받네. 나는 뭐 쌈마이영화 전문필자냐? 자기는 편집장의 글에서 온갖 폼 다 잡으면서 나는 주욱 대한민국 1% 쌍팔연도 스타일로 나가라 이거야? 왜 이러셔, 나도 때로는 예술영화 보면서 감동받는다구(아, 구차해). 그런데 요새 건달 아저씨는 왜 자꾸 나랑 똑같은 영화에 대해서 쓰는 거야. 비교되게. 이건 완전히 도널드 카우프만 버전 대 찰리 카우프만 버전이잖아. 쳇, 나라고 있어 보이게 쓸 줄 몰라서 못 쓰는 줄 알아? 음… 실은 쓸 줄 몰라서 못 쓰는 게 맞는 말이긴 하지. 나도 있어 보이는 책이나 철학자도 가끔씩 인용하며 폼나게 쓰고 싶어. 근데 개뿔이라도 읽은 책이 있어야 인용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언젠가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자기는 요새 읽는 책이 무슨 명언집이라고 해서 속으로 ‘이런 한심한 인간이 있나’ 하고 비웃었는데 그때 책 제목이라도 물어봐 둘 걸 그랬어. 아냐, 괜히 견적도 안 나오는 폼 잡으려다가 잘리기 전에 주제파악하고 차라리 어떤 필자도 시도하지 않는 쌍팔연도 스타일로 특화하는 게 그나마 가늘고 길게 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선택을 하라면 나는 찰리보다 도널드를 택하겠어. 이를테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대중의 코드에 착착 끼워맞춰서 돈많이 버는 대중작가가 되는 거지. 영화를 봐. 그런 사람이 돈도 잘 벌 뿐 아니라 성격도 원만하잖아. 금상첨화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런데 이건 설상가상이야. 과정은 고독한 작가주의인데 결과는 실패한 상업영화라고나 할까. 마감날만 되면 만날 머리 쥐어뜯고 밤새고 난리를 치지만 결과는 ‘열독률 0%에 도전한다’ 이런 거.
아, 역시 전화가 왔군. 그냥 한번만 죄송하다고 하면 될걸, 왜 그 짧은 통화시간 동안 죄송하다는 말을 네번이나 한 거지? ‘정말’ ‘너무’ 이따위 너절한 수식어까지 붙이면서 말야. 빌어먹을, 겉으로는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나를 우습게 볼 게 틀림없어. 하긴 이렇게 만날 굽실굽실대고 쩔쩔매며 전전긍긍하는 인간을 누가 우습게 보지 않겠어. 나라도 개무시하겠다.
분명히 이 글이 나가면 다들 욕을 하겠지. 지면이 너네집 휴지통이냐, 되지도 않는 소리는 네 일기장에나 내뱉어라, 필자 바꿔달라, <씨네21> 정기구독을 끊겠다‥. 그렇지만 책임소재를 따진다면 이건 순전히 찰리 카우프만 탓인걸. 수천만달러를 쓰는 영화에도 그 작자는 자긴 인생 괴로운 걸로 반을 메웠는데 뭐.
이 정도 원고료 받고 한번 정도는 이렇게 써도 되지 않을까? 그럼 나머지 반은 <어댑테이션>처럼 스릴과 반전, 섹스, 화해의 눈물로 화끈하게 메워야 하지 않느냐구? 어… 음… 다음회를 기대하시라(으흠, 이렇게 쓰면 다음회까지는 잘리지 않겠지? 아,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김은형/ <한겨레> 문화부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