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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역할이 편안해요,<어댑테이션>의 니콜라스 케이지
박혜명 2003-05-21

영화 <어댑테이션>의 주인공은 두명의 쌍둥이 형제다. 형 찰리 카우프만은 뛰어난 창의력을 타고났지만 외모를 비관해 우울하고 자기강박적이다. 동생 도널드 카우프만은 이와 대조적으로 똑같은 외모임에도 낙관적이며, 천재가 아닌 대신 소박한 행복의 비결을 아는 인물이다. 풍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캐릭터는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어댑테이션>의 실제 작가 찰리 카우프만의 재능뿐 아니라 각본만으로 표현될 수 없는 디테일을 창조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1인 2역 연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덕분에 관객에겐 한 배우가 소화한 두 인물의 윤곽이 분명했다. 정작 배우 자신은 혼란을 겪었을지라도.

“가끔씩은 정말 좌절스러웠다. 두 형제 중에 내가 지금 어느 쪽을 연기해야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소리를 꽥 지른 적도 있다.” 현장에서 찰리가 도널드에게, 도널드가 찰리에게 던지는 대사를 실제로 상대해준 건 그의 친동생이거나, 테니스공이었다. “역을 바꿔서 연기할 때는 상대역으로 내가 했던 대사를 기억하려고 했고 테니스공의 리액션 타이밍도 계산했다. 테니스공이 대사를 치고 있는데 내 대사가 거기에 겹치면 안 되니까.” 감탄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같은 1인2역 연기로, 니콜라스 케이지는 자기 안에 품은 표현의 세계가 어떤 종류로 어느 만큼의 폭을 지녔는지 규정하기 섣부르다는 점을 입증해 보였다.

비교문학 교수인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댄서이자 안무가인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책과 오페라, 철학에 둘러싸여 지적 자양분을 충분히 취하며 컸다. TV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작심하고 덤볐다가 거실 카펫을 찢어버리고야 말았던 6살 때가 배우를 결심한 최초의 순간이다. 어릴 적 마네킹이 창문을 두드리고 미라가 침대로 기어오는 악몽에 시달렸던 그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어머니가 집과 병원을 수시로 오가던 경험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불성실한 학생으로 본드 영화와 마블코믹스, 스티븐 킹의 호러소설들에 심취해 지내다가 결국 17살에 베벌리힐스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코폴라 가문 출신이라는 신분증만으로도 수월하게 패스할 수 있었던 할리우드의 정문조차 그는 페어팩스 극장에서 팝콘 파는 매점 직원의 자격으로 두드렸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의 초기작 캐릭터들이 대체로 비뚤어졌거나 괴팍스럽거나 우울한 이유를 일부분 설명해준다. <버디>의 베트남 참전 군인 앨 콜럼바토,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얼뜨기 도둑 허버트, 반항아적인 풍모로 줄담배를 피워대는 <광란의 사랑>의 세일러가 그 자장 안에 있다. 본인은 ‘인생에 대한 행복한 찬가’라서 맘에 들지 않은 영화였다는 <문스트럭>의 로니조차도 그가 가진 묘한 오프비트적 인상에 빚지지 않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캐릭터였다. 여기에 진한 눈썹, 부릅뜨면 무서울 만큼 어두운 눈매, 중력을 강하게 받아 아래로 늘어진 입이 만들어낸 그의 외연적 인상은 비열함과 위축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연인으로서의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캐릭터를 구체화한다. “나는 ‘어두운 역할’(dark stuff)을 할 때 좀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페기 수 결혼하다>와 같은 경쾌한 로맨틱코미디, <더 록> <페이스 오프> <콘 에어>로 이어지는 이른바 ‘액션무비 트릴로지’, 그리고 최근의 <시티 오브 엔젤>이나 <코렐리의 만돌린>까지도 43편에 이르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다른 한 부분이다. 그래서 그는 덧붙였다. “만약 그런 것만 계속 하다보면 결국 난 시무룩하고 화난 인물로 굳어질 거다.”

복잡하고 모호한 인물은 언제나 매력적이며, 그런 인물의 내면이 자연인으로서의 배우와 교차할 때 배우의 연기는 눈부신 후광을 입는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그런 지점에서 자기 존재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슈퍼스타덤의 대로보다 괴벽스럽고 엉뚱한 갈래길을 곧잘 선택해온 그의 취향만큼 기이한 것은, 이미 밝혔듯 그가 보여준 행보의 비연속성 혹은 비일관성이다. <어댑테이션>이 그의 커리어에 또 다른 기점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그 방향을 고수하지 않을 것 또한 분명하다. 액션 트릴로지 2탄을 준비할 수도 있고 멜로 트릴로지 프로젝트를 구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어떤 순간에 그는 다시 자신의 별난 취향대로 상식의 룰을 깨는 매력적인 지점에 와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 샌더슨이 꽤 오랫동안 회자되었던 것처럼 <어댑테이션>의 카우프만 형제가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는 가끔씩 우리를 놀라게 하겠지만 그 연기력의 세계가 던져주는 충격은 우리의 예상보다 긴 여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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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GAM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