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트라이베카영화제(TFF)가 자칫 정체성 없는 거리 축제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올해 두 번째인 이번 TFF는 지난 5월3일부터 11일까지 10일간 열렸다. 총 230편의 작품들이 소개됐고, 패널토크와 패밀리 페스티벌, 무료 콘서트, 야외 영사회 등 많은 행사로 구성됐다.
‘뉴욕 다운타운 재건’을 위해 지난해 로버트 드 니로를 주축으로 시작된 이번 영화제는 그 의도는 좋았으나 내실이 없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볼거리는 많았지만 특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선 영화편수를 보면 알 수 있다. TFF의 가장 큰 경쟁 영화제라고 할 수 있는 뉴욕필름페스티벌의 경우 작품 25편이 2주에 걸쳐 소개된다. 올해 TFF에서는 경쟁부문에만 17편의 장편 극영화와 24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 이 때문에 출품된 작품을 모두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기본적인 영화 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스케줄을 짜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제는 지난해 5일 동안 15만여명의 관람객을 트라이베카 지역으로 끌어들였고 이로 인해 인근 비즈니스에 1천만달러의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수익은 일시적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다운타운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됐던 이 행사는 영화제 관계자들의 의도와 달리 지속적인 비즈니스 향상에는 큰힘이 되지 못했다는 것.
반면 올 행사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아져 영화팬뿐 아니라 다양한 관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상영작의 장르와 소재들이 다양해졌고, 패널토크도 만화와 영화 속의 슈퍼 히어로를 비교하는 등 모든 연령층 관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로 구성됐다. 배터리 파크에서 열린 무료 콘서트에는 노라 존스와 힙합 그룹 ‘루트’, 로비 윌리엄스, 주얼, 숀 폴 등 정상급 가수들이 공연했다. 역시 무료로 개최된 야외 영사회에는 인터넷 투표로 ‘뉴욕에서 촬영한 가장 로맨틱한 영화’로 꼽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비롯해 <다이너> <그리스> 등이 3일간 상영됐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나 <데일리뉴스> 등은 TFF가 이같은 백화점식 행사를 차차 정리하고 자기만의 색깔을 찾지 못한다면 앞으로 지속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 영화제에서는 지난해와 달리 외국영화를 ‘인터내셔널 쇼케이스’로 구분하지 않고 일반 작품들과 함께 경쟁부문에 포함시켰다. 경쟁부문은 3개로 나뉘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는 2편 미만의 작품을 연출한 신인감독의 작품이 해당되며, 다큐멘터리2 부문은 2개 이상 연출한 감독들의 작품들만이 뽑혔다. 후보들에게는 총 11개의 상이 수여됐다.
장편 영화상은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은 중국 리양 감독의 <눈먼 화살>에 돌아갔다. 중국 내 광산 노동자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상영금지 조치를 받은 이 작품은 <뉴욕타임스>를 비롯, 많은 미디어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외에도 다큐멘터리 부문 작품상은 어린이의 시점에서 코소보의 실태를 보여준 <평범한 인생>(A Normal Life)이, 남우주연상은 <야시와 재거>에서 이스라엘 동성애 군인의 사랑을 그린 오해드 크놀러와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의 합작 로드무비 <어떤 비밀들>에 출연한 이고어 배레스가 공동수상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더 쉬운…>으로 감독 데뷔한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시는 이 작품으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경쟁부문에 출품됐던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은 수상은 못했으나, 영화제 시작 2주 전부터 두 차례의 스크리닝이 매진되는 등 큰 관심을 모았다. 이번 행사에는 박 감독이 직접 참석, 관객과 질의응답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경쟁부문이 아닌 쇼케이스로 초청된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는 금요일 자정과 토요일 오후 1시15분이라는 비교적 좋지 않은 시간대에 편성돼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으로는 로리 케네디 감독의 다큐멘터리 <한 소년의 삶>(A Boy’s Life), 뉴욕시에서 제작 및 촬영이 이루어진 제니퍼 엘스터 감독의 극영화 <진실의 조각들>(Particles of Truth), 아프가니스탄영화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상 후보에 오른 <파이어댄서> 등이 있다. 또 대표적인 뉴욕 출신 감독 마틴 스코시즈가 지난해 기획한 ‘클래식 복원 필름 시리즈’가 다시 실시돼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 <석양의 무법자>와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이 상영돼 대만원을 이뤘다.
미시시피의 트레일러파크에서 할머니와 사는 7살짜리 정신질환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한 소년의 삶>은 2년간에 걸친 촬영을 통해 소년이 교사들과 정신과 의사, 친모 등의 도움을 통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감독을 맡은 로리 케네디는 로버트 F. 케네디의 딸이다. 9…11 테러 직후 제작에 들어갔던 <진실의 조각들>은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에 걸맞게 트라이베카 인근에서 대부분 촬영이 이루어진 작품. 특히 케이블 채널 ‘쇼타임’의 게이드라마 시리즈 <퀴어 애즈 포크>에 출연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게일 해럴드가 주연을 맡아 상영극장 주위는 인기 가수의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뉴욕으로 망명한 아프가니스탄들의 이야기를 다룬 <파이어댄서>는 감독 자웨드 웨슬이 2001년 10월 이 작품의 프로듀서 네이선 파웰에게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내용이 영화제 프로그램 작품 소개 중 포함, 재판을 앞두고 있는 파웰의 변호사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올 영화제에서는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한 <다운 위드 러브>가 오프닝 작품으로 상영됐고, 닐 라뷰트 감독의 <사물의 형태>(The Shape of Things),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인 로스>, 대니 보일 감독의 , 마크 월버그와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이탈리안 잡> 등 개봉을 앞둔 기성 감독들의 영화들이 소개됐다.뉴욕=양지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