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영화기술을 익힌 최인규·한형모 감독을 떠올리다“문법은 똑똑한, 진정한 정통파들이지”
<자유부인>(自由夫人) | 1956년 | 감독 한형모 | 출연 박암, 김정림, 양미희, 이민, 김동원 | 특별출연 백설희.
북한에서도 나운규, 나운규 하지만 나운규 필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혹 다른 자료가 있다고 해도 전쟁 때 다 없어졌다고 봐야지. 일본서 누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고. 왜 그런고 하니, 첫째 보관이 잘됐을 수가 없다. 내가 (북한에서) 돌아와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성춘향> 네거 2시간10분짜리를 다 잘라가지고 1시간30분을 맨들어놨다. 요즘에 내가 다시 복원해놨지만 그중 옥중장면이 다 없어졌었다. 찾다보니 필름이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1962년에 아시아영화제를 필리핀에서 한 일이 있다. 거기 자막 넣어 보낸 프린트가 나왔는데 훼손돼서 볼 수가 없었다. 40년 전 프린트, 일본에서 제대로 현상했고, 보관 잘했다는 필름도 뻘겋게 못 보갔는데 나운규가 남아 있다고 그게 나오겠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프린트 중에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에 기부한 것이 있다. 모마에 내 영화를 맡긴 이유는 영구 보존이 되기 때문이다. 시설이 잘돼 있잖아? 지금 우리 영상자료원도 내가 늘 가서 불평하지마는 스틸이네 뭐네 보관을 제대로 하려면 특수하게 보관해야 하는데 그게 좀 부족하다. 예를 들어 자막있는 영화가 하나도 없다. 옛날에는 옵티컬이 안 됐으니까 위에다 하나 기저귀처럼 채워가지고 구워야지 흰 글씨가, 자막이 나오는데 그걸 떼서 잃어버려가지고 자막있는 영화가 남아 있는 게 없다. <벙어리 삼룡이>도 요전까지 자막있던 것이 없어진 일이 있다. 보관 잘되기가 그렇게 어렵다.
자기가 찍은 것도 귀찮아서 기부를 하는데, 옛날 삼류 흥행하던 사람이 필름을 저온 현상해가지고, 5도다 6도다 특수하게 조건 맞춰 보관할 수 있었겠나? 내가 26년 생인데 <아리랑>이 그해에 나왔다. 열살쯤 돼서 <아리랑>을 봤는데 많이 끊어진 걸 봤다. 아마 우리가 본 영화는 삼류관에 왔을 때니까 삼분의 일 정도 끊어진 걸 봤갔지. 그게 벌써 100년 가까운 얘긴데 어떻게 남아.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 봤기 때문에 눈 안에 확실히 있다.
35년 넘어 우리 영화로 발성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이종철이가 한 <홍길동>을 지금도 잘 기억한다. 그러나 발성으로 한다는 것이 꽝꽝 울리고 잘 들리지를 않아. 제대로 들리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만든 군국주의영화, 어용영화가 대부분이었고. 결국 그때 발성영화라고 하는 것이 일본 사람하고 한 것이 발성영화지, 우리 영화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때 다 일본 사람들이 뒷받침해서 찍었으니까.
보지는 못했으나 스승에게 들은 얘기로 <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다다시 감독, 1943)란 공비 토벌하는 그런 영화다. 우리 스승이, 최인규 감독이 거기서 조감독을 했다. 처음에는 극장에서 간판을 그렸고, 자동차 운전사도 했고, 그러면서 기계를 많이 만졌다고 그러는데, 그 사람은 활동사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일제시대 일본 사람한테서 교육을 많이 받았고, 그런 점에서 그 세대 감독 중에 기술적으로는 아마 으뜸 갈 것이다. 물론 기술적으로 치중하고 내용에 치중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가지고 휴머니즘을 다룰 줄 몰랐고, 책(시나리오)이 좋으면 영화가 좋게 나오고 책이 나쁘면 나쁘게 나오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대신 영화문법은 확실하다. 여기서 내가 문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요즘처럼 아방가르드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소독스한 걸 말하는 것이다. 시선을 어떻게 넘어가지 말아야 하고, 어디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가야 하는가 하는 기초를 말하는 것이지. 최인규씨하고 똑같은 사람이 한형모 감독이다. 역시 대본이 정확하면 잘 찍고 대본이 나쁘면 엉망으로 나오는데, 그건 그 사람이 촬영기사였으니까 테크닉이 좋아서 대본을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자유부인> 보면 문법은 똑똑하다. 구술 신상옥/ 영화감독·<이조여인잔혹사>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정리 이기림/ 영화사 연구사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