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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이다혜 2003-05-16

<선생 김봉두>가 좋은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화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교사와 학생이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에는 그게 어떤 작품에서 나오든 나는 무방비상태가 된다. 오래 전 전교조 교사들이 교단에서 무더기로 쫓겨날 때, 신문 한켠에 종종 소개된 스승과 학생의 이별장면은 언제나 눈물 범벅을 만들어냈다(전 편집장인 안정숙 선배에게는 불행한 아이가 우는 장면이 그런 작용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 김봉두>를 믿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품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영화가 너무 착하기 때문이다. 선의가 승리하는 이야기는 가능하면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속에서 외친다. 그건 내가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런 걸 보고 감동하는 건 가증스러운 짓이기 때문이며, 세상도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영화는 대개 판타지다. 착한 걸 믿지 않고 사는 건 못된 짓이지만, 그렇게 못되게 사는 게 그나마 세상을 좀더 정확히 보고, 무엇보다 내가 덜 다치는 길이라고 내 경험이 훈계한다.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가는 일은 그래서 두려웠다. 한 학생이 편지지 4장을 빼곡히 채운 편지로 강의를 간절히 청해왔을 때, 거절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김소희를 울게 한 그 편지는 너무 착했다. 마치 <선생 김봉두>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시골 소녀의 말투 같았다. “저는 농업고등기술학교에 다닙니다. 이건 그만큼 제가 뛰어난 학교가 아닌 가장 낮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 하지만 저는 그런 저희 학교를 사랑합니다. 그건 저희 학교가 교과서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존중과 존경에 대해 알았고… 이 세상에서는 배우기 힘든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가겠다고 해놓고도 마음이 무거웠다. 픽션이 아닌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정말 착한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실망을 안기기도 싫었지만, 내가 갑자기 착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학교는 아름다웠다. 2학년이 키운 채소와 3학년이 키운 쌀로 밥과 반찬을 삼고, 연말이면 전교생과 교사들이 모여 김장을 한다는 이곳은 학교라기보다 작은 공동체마을 같았다. 학생이 교장선생님에게 “우리 담임선생님한테 제가 그때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영화 보러갔다는 말 절대 하시면 안 돼요” 하고 다짐을 받는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 같았다. 얼떨결에 70여명의 전교생들 앞에 서서 한참 더듬거렸다. 더듬거리면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충분히 나쁘니 영화를 통해서라도 나쁜 것에 대한 면역을 키우라는 말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것을. 이건 혹시 쓸데없거나 해로운 말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다른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다행히 꽤 많은 학생들이, 내가 그들 나이 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깊이 떨구고 잠시 딴 세상에 가 있었다).

강사료 대신 현미 튀밥 한 봉지와 산나물 한 다발을 받아 서울로 향하면서,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과 대화를 할 준비도 안 돼 있으면서, 그들 앞에 서서 떠들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김봉두 선생처럼 그들에게 배울 시간도 갖지 못했는데…. 그래도 한 가지만은 인정해야겠다. <선생 김봉두>는 판타지만은 아니었다. 착한 사람들의 무구한 선의는 세상 어딘가에 늘 존재한다. 이젠 그걸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