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Round | 관습 vs 관습
미해결 사건, 더 이상 ` 핸디캡 ` 아니다
“<살인의 추억>의 시나리오가 우리에게도 왔었다.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높아 투자하고 싶긴 했으나 스릴러라는 장르의 선입견이 걱정스러웠다. 무겁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는 미해결의 엔딩이 부담스러웠고 불안해보였다.”(권미정 쇼박스 한국영화팀장)
<살인의 추억>은 상업영화의 오랜 관습 몇 가지를 정면으로 위배했다. 흥행전략상 가장 난점으로 꼽히던 미해결의 엔딩을 포함해 굿가이·배드가이의 혼합형 캐릭터, 영화의 숙명이라 할 관음증에 대한 거스름 등 초심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모험을 감수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었다. 장르적으로 풀어서 잡는 걸로 끝낸다? 관객이 얼마나 찝찝해하겠나. 범인을 못 잡는 대신 그토록 범인을 잡고 싶어하는 형사들의 시선에 철저하게 맞춰나가기로 했다. 그 하나의 감정선을 좇아가다 끝내는 폭발하게 만드는….”(봉준호)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건 엔딩장면 때문이었다. 절대악을 저지르는 게 엘리펀트맨 같은 이상한 인간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 장르로 풀면 오히려 영화가 죽는다고 생각했다.”(차승재)
결국 범인을 못 잡는 결말은 ‘핸디캡’이 아니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됐다. 엔딩장면은 고심 끝에 네 가지 버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선택한 엔딩장면 안에서도 사소한 것이나마 관습을 또 거스른다. 배우에게 카메라를 정면으로,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응시하게 했다. 오죽했으면 촬영감독이 조금만 옆을 보면 안 될까라고 묻기까지 했을까. 정면 응시에는 영화의 전체 맥락과 연결되는, 감독의 포기할 수 없는 의도가 깔려 있다. “얼굴을 따르는 로드무비”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을 메뚜기 잡는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시작해 용의자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형사의 정면 응시로 마무리했다. 여동생을 성폭행한 남자와 그를 잡아온 오빠의 얼굴을 보여주며 누가 강간범인지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답을 주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의도된 것이다.
5 Round | 마케팅 vs 마케팅
범인을 잡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생겼다. <살인의 추억>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작품이다. 프로듀서에게 봉준호 감독과 일해보라고 하면서 그랬다. <공동경비구역 JSA>만큼 할 수 있는 영화이니 잘해보라고.”(차승재)
영화가 완성되고 언론 시사회까지 마쳤다. 미디어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래도 영화관계자들은 흥행을 예측할 수 없었다. 잘 만든 영화라고 관객이 좋아하는 건 아니다, 라는 게 최근 극장가의 기류였으니.
<접속>과 <공동경비구역 JSA> 개봉 전에는 영화가 가진 부정적 요인 때문에 제작사 명필름의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감미로워야 할 사랑 이야기에 당시로서는 차갑고 낯선 이미지의 PC통신과 컴퓨터가 끼어드는 게, <공동경비구역 JSA>는 여전히 껄끄러웠던 분단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는 게 곤혹스러웠다.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는 대박을 점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정면으로 승부했다. <접속>의 경우 90년대식 새로운 사랑법 등으로 옷을 입혔는데 그게 먹혀들어갔다.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유니텔 가입자 수가 20%가량 늘어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우, 마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북한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고 영화는 사회적으로 이슈화됐다. 물론 ‘영화의 힘’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상업성만으로 승부하지 않고 가능한 ‘대박’은 사회의 어떤 기류를 적절히 포착하거나 제어할 만한 이슈를 가졌을 때라야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살인의 추억>은 ‘이슈 파이팅’을 할 만한 요소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영화관계자들은 그래서 더 불안했다.
“영화의 재밌는 부분을 강조하는 홍보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도 피해자 가족의 슬픔이 남아 있는 실제 사건이니까. 그래도 포스터와 예고편이 너무 무겁게 가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쏟아졌다. 처음부터 무게있게 가자고, 그게 맞다고 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진지하게 가야 하나 회의도 들었다. 제목이 무겁다고 협찬 하나 할 수 없었으니….”(김무령 프로듀서)
영화가 개봉됐다. 객석에선 폭소와 비명이 오가며 관객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걸 증명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관객의 분노다. 관객이 범인을 잡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80년대와 그때의 사건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는 영화의 키워드 ‘화성’을 인터넷의 인기 검색어로 만들었다. 일부 매체에선 당시 사건에 대한 기획기사까지 만들었다. 마침내 사회적 반향이 생겨난 것이다. 순전히 ‘영화의 힘’으로 일궈낸 셈이다. 그리고 그 비결은 ‘진정성’에 있었다고 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Epilogue
다시 또 차승재란 인물과 싸이더스라는 제작사로 귀결된다. 그는 절대영화라는 말을 썼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포획하고픈 절대목표를 뜻했다. 그러면서 “영화를 한다는 입장의 프로듀서에게는”이란 단서를 붙였다. 자기들 같은 사람의 숙명은 평생 그 길을 좇다가 답을 찾지 못한 채 죽는 게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지금은 고전이 돼버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아놀드 하우저는 영화의 관객을 이렇게 분석했다. “이 전세계적인 독특한 집단의 인간들은 매우 모호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관에 몰려든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들이 어떤 영화를 싫어할 경우 그 싫어하는 이유가 일치할 확률이란 거의 없다.” 아마도 차승재와 싸이더스는 절대영화를 향한 무모한 게임을 계속 해나갈 것이고, 가끔씩 관객들은 그들의 영화에 열광할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 일으킨 ‘사건’이 그토록 감격스러운 이유는 흔치않을 그 양자의 만남이 너무 힘겹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남의 여진은 한국영화계 안에서 꽤 오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