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정진영의 <와일드카드> 제작일기 [3]
김현정 2003-05-16

술? 깨라면 깬다

2003년 2월9일_부산 해운대

>>

이제 영화의 끝이 보인다. 범인 검거 시퀀스를 찍는 부산 로케이션 촬영. 촬영기간 내내 말 그대로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에 시달리던 스탭들. 따뜻한 부산 바닷가에서 신이 났다. 하루 촬영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술자리. 영화현장에서 뒤풀이 술자리는 빼놓을 수 없는 여흥이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스탭들이 영화현장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일 게다. 일하고 같이 술먹고, 싸우고, 화해하고…. 청춘남녀들은 몇쌍의 커플을 탄생시키고….

<와일드 카드>의 현장 집합시간은 촬영분량이 아무리 많아도, 전날 촬영 종료시간에 따라 자동으로 정해진다. 이른바 김유진 ‘룰’이다.

“촬영이 끝나면 숙소이동 및 취침준비 1시간, 수면시간 7시간, 기상 및 식사, 현장이동 2시간. 도합 10시간 뒤, 집합시간!”

하지만 스탭들은 곱게 자지 않는다. 아무리 충분한 수면시간을 줘도 술에 바친다. 그럴 경우 추가로 한두 시간 정도가 더 휴식으로 배정된다. 이른바 김 감독이 정한 ‘술 깰 시간!’ 그는 술과 사람에 대해 엄청 관대하다.

다쳤으면 병원엘 가야지!

2003년 2월13일_부산 ㅂ나이트클럽

>>

보조 출연자를 수백명 동원한 나이트클럽신. 우리가 이 장소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영업 후 새벽 6시부터 영업 전 오후 2시까지. 찍어야 할 분량은 많고, 시간은 없다. 처절한 액션과 우리 영화의 드라마가 집약되는 엔딩신. 카메라가 한꺼번에 세대씩 돌아가고, 현장이 전쟁터 같다. 전쟁이 일어나면 부상자가 생기는 법. 왕수창 역을 맡은 배우가 뒤로 쓰러지다가 철제 테이블 다리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뒷머리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는 그에게 김유진 감독이 다가가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도 당장 병원에 갈 것을 명한다. 김유진 감독은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 배려받지 못하는 인간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 것인지 그는 알기 때문이다.

김유진 감독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영화감독의 상처는,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 흥행을 못한 감독은 죄인이고, 평단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감독은 못난이다. 그는 데뷔 이후 <약속> 전까지 연거푸 흥행에 실패했다. 흥행에 대한 그의 철학은 분명하다. ‘흥행은 결과에 불과하다. 작업에 참여한 스탭들이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작품이라면 그것으로 감독은 행복하다.’ 그러나 감독에게 흥행은 엄연한 현실. 흥행에 실패한 감독은 제작자의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흥행작이 고작 한개밖에 없는 50대의 감독. 그는 흥행이 불확실한 ‘늙은’ 감독으로 취급받고 있다.

김 감독에 대한 평단의 평도 그리 후하지는 않다. <참견은 노, 사랑은 오 예>로 감독상을 받았고,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로 페미니스트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는 ‘주목할 만한’ 감독의 반열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관객으로부터 외면받는 것 이상으로 평단의 외면은 감독을 외롭게 만든다. <약속>이 흥행에 성공했을 때도, 평단의 평은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한마디로 흥행을 노리고 만든 영화이니 흥행에 성공한 게 당연하다라는 평가. 흥행만을 생각하고 누선을 자극한 신파영화이고, 사회현실에 눈을 감아버린 오락영화라는 비판.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비판엔 아랑곳하지 않는 그이지만, 한동안 그가 괴로워했던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씨네21>의 기사 중 한 대목.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답게’라는 표현.

그는 어느 날 술을 마시며 내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이야기를 해서 서러운 게 아니다.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게 안 좋은 의미로 쓰여지는 게 슬프다.”

자신의 영화적 전통을 충무로로 삼고 있는 50대의 감독. 평단으로부터 그는 ‘낡은’ 감독으로 취급받고 있다.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2003년 4월7일_상봉동 실내 경륜장

>>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2월20일 찍고, 한달 반 만에 마지막 촬영을 한다. 과천 경마장 섭외가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대안을 마련해 찍는 장면. 여간해서 짜증을 안 내는 감독님이 짜증을 부린다. 이해가 간다. 장소 섭외가 안 되어서, 찍어야 할 내용을 많이 포기하고 가는 촬영. 생각만 해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김유진 감독은 촬영장에서 참 많이 걸어다닌다. 그게 그의 콘티 구상방식이다. 어려운 장면을 찍을 때마다 왔다갔다 혼자 생각하며 하염없이 걸어다닌다. 그의 영화는 관객이 보기에 어렵지 않다. 관객이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든다. 어쩔 때는 너무 설명적이다 할 정도로 관객의 이해를 위해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그가 참 영화를 슬렁슬렁 쉽게 찍는 것으로 사람들은 오해를 한다. 천만에 말씀. 그는 관객이 쉽게 보게 하기 위해 어렵게 혼자 고민한다. 남들이 알아듣게 이야기를 쉽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경지이다. 자기 정리가 완벽해야 그것이 가능하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는 오늘 참 많이 걸었다. 그 다음날도 그는 많이 걸었고, 그리고 그날 모든 촬영이 끝났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