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애니로, 애니를 동화로
2002년 6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일곱살>로 학생 경쟁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김상남(30) 감독. 그녀의 이력은 좀 특이하다. 제주 출신으로 동국대 지리교육과를 95년 2월 졸업했다. 그리고 은행(제주은행)에서 창구직원으로 4년 넘게 근무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애니메이션 감독이?
조금 더 들어보시라. 고교 시절 만화가가 꿈이었던 김상남 학생은 대학 시절 학보사 만평을 그리고 만화동아리에 가입해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직장에 다니며 ‘조신하게’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서울 지사 근무는 그녀에게 한겨레문화센터 만화강좌를 듣게 했고, 1999년 은행권 구조조정은 그녀를 은행원에서 필름애니메이션제작학교 학생으로 만들었다.
“문화센터 시절 전승일 감독님과 이성강 감독님의 단편을 처음 보았어요. 우선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금세 ‘내 그림도 움직여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2000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전공 2기로 입학, 1학년 때 만든 작품이 <일곱살>이다. 엄마가 불을 꺼버린 옛날식 화장실에 혼자 남게 된 일곱살 소녀 유주. 이 밀폐된 공간에서 그녀가 느끼는 즐거움과 공포를 씨줄로,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미운 일곱살’과 엄마와의 갈등과 화해를 날줄로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누구나 하나 정도는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잖아요. 저는 얼굴이나 목소리를 한번 보거나 들으면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은행에서도 서비스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죠.”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울림이 느껴지는 것은 평소 사람들의 인상과 버릇 등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알게 모르게 작품 속에 녹아 있기 때문 아닐까. 특히 작품에 들어가기 전 자료수집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는 것도 그의 작업 습관 중 하나다.
“감을 잡기 위해서예요. <달빛 프로젝트>만 하더라도 달과 관련된 동서양 각종 전설과 설화를 거의 다 찾아봤어요. 또 어떤 방식이 그런 분위기에 잘 어울릴지도 한참 고민했었죠.”
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자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달빛 프로젝트>는 최근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린 ‘인디아니마 1주년 기념상영회’에서 일반에 공개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달을 갖고 싶은 소년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달을 따준다는 훈훈한 내용의 절지 \애니메이션이다. 불투명 셀과 색연필로 페이퍼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낸 <일곱살>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천으로 종이 인형의 옷을 해 입히는 등 색다른 질감을 내는 데 좀더 신경을 썼다.
지난해 가을엔 촬영 막바지에 있던 영화 <품행제로>의 애니메이션 작업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영화 개봉시 작업한 부분이 잘려나가 아쉬움이 크다고.
올해 1월부터 3월까지는 동화책 그림을 그렸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베틀.북 펴냄)라는 책이다.
“원래 그림책을 좋아했어요. 아이들을 관찰하는 것도 즐겁고요. <배고픈 애벌레>의 원작자인 에릭 칼이나 <슈렉>의 원작자인 윌리엄 스타이그 같은 작가들을 좋아합니다. 좋은 그림책을 보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어요.”
전주대 영상만화과 강사로도 출강하고 있는 김 감독은 현재 <일곱살>을 동화책으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실험적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상업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지는 않느냐고 질문에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아직 머리와 손이 따로따로 노는 형편이에요. 제 작품을 다섯개 정도는 만들고나서 고려해볼래요.”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