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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지만,영리하고 보편적인 <어댑테이션>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쓰고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한 <존 말코비치 되기>는 코믹하면서도 머리를 쥐어짜게 만드는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를 즐기는 관객의 두뇌회전을 자극한 바 있다. 같은 팀이 만들어낸 대단히 영리한 후속작 <어댑테이션>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웬만한 관객의 두뇌게임 도전은 간단히 물리쳐버릴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여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어댑테이션>의 각본작업에 빠져들게 하는 능력은 정말이지 탁월하다.

“내 머릿속에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대뜸 묻는다. 이렇듯 <어댑테이션>의 많은 부분은 관객을 카우프만의 신경증적 의식의 흐름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불안 때문에 어찌나 호들갑을 떨며 안절부절 늘 떠들어대는지 심지어는 우디 앨런조차도 그와 비교하면 경건한 보살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어떤 작은 대목도 가볍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찰리의 정체성 혼란은 무려 40억년 전 지구 첫 생물 출현 시기로 플래시백했다가 이 작가의 탄생과 함께 다시 현재로 돌아와 스튜디오 이사(틸다 스윈턴)와의 오찬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희귀화초와 희귀화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해 수잔 올린이 쓴 기나긴 보고서 <난초도둑> 각색작업을 그에게 맡아달라고 한다. 찰리는 이 일을 맡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다 동원하지만 결국 작업은 그에게 떨어진다. 타자기 앞에 앉은 찰리의 고통은,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이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은 얼마나 쉽게 보고서를 썼을까 하는 상상 때문에 더욱 커진다.

이쯤에서 카우프만은 자신의 모든 이야기 재주를 한데 끌어모은다. 찰리가 미친 듯이 일감을 매만져감에 따라 <어댑테이션>은 점점 조프 다이어의 97년작 와 닮아간다. D. H. 로렌스에 관한 연구라고 추정되지만, 정작 내용은 그런 연구보고서를 쓸 능력이 안 된다는 다이어의 이런저런 고백과 푸념으로 가득한 그 작품 말이다. 또한 이 영화에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의 울림도 담겨있다. 비록 찰리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라는 고뇌에 찬 거장과는 그 명성에서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수잔 올린의 작가 사진과 텔레파시적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내가 겪고 있는 패닉과 자기혐오 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황당할 정도의 상호텍스트성(mad intertextuality), 시간을 마구 뛰어 넘나드는 진행, 온통 평행적으로 병치된 액션 등에도 불구하고 <어댑테이션>은 전적으로 문학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테크닉이 지나치게 번지르르한 것도 아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가 영화연기에 관한 영화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존즈가 배우들을 장악하고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크리스 쿠퍼가 연기하는 존 라로시는 카리스마 넘치게도 앞니 하나가 빠진 모습으로 떠버리 천재를 열연하며, 스트립은 맨해튼의 디너파티 접대를 맡은 단 한 장면만으로도 오스카 조연상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케이지는 찰리 역할뿐 아니라 그의 쌍둥이 동생 도널드까지 맡아 연기하면서 오스카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선다. 형의 경멸을 받는 도널드는 찰리가 보기에, 온갖 잡스럽고 어리석은 아이디어의 쓰레기통임에도 불구하고 첫 작품인 라는 다중인격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스릴러를 어마어마한 값에 간단히 팔아치울 뿐 아니라 여자를 낚는 데도 재능을 발휘한다.

이쯤에서, <어댑테이션>은 몇 가지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영화는 비록 긍정적인 도널드 카우프만의 손을 들어주고 크레딧에 그의 이름을 버젓이 소개하기까지 하지만, 도널드 카우프만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변화해야 하며 그 변화는 반드시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말을 카우프만은 거만스럽게 받아들여 양면적으로 활용한다. 과 마찬가지로, <어댑테이션>은 자신의 꼬리마저 즐거이 삼켜버리는 영화다. 액션이 일단 도널드의 각본을 따라 움직이지 시작하면, 우리는 갑자기 사이버포르노와 이국적 마약과 자동차추격전과 간통과 살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버린다. 어쩌면, 브로마이드를 들어 보이며 해피엔딩을 주장하는 끝대목이야말로 내러티브의 습지에서 피어난 한 떨기 난초일지 모른다.

창의성이란 면에서 전혀 지칠 줄 모르긴 하지만, <어댑테이션>은 조금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어댑테이션>이라는 이 영화 제목은 이 작품이 올린의 책을 가지고 각본을 쓰는 데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그린 극임을 가리킨다기보다, 노골적으로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생명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 진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반복악절이라고 보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옳을 것 같다(즉, 여기서 ‘어댑테이션’이란 ‘각색’이 아니라 ‘적응’을 뜻한다는 말 - 역자). 다시 말해, 할리우드에서 이루어지는 창조과정에 대한 풍자를 담은 이 이야기가 보편적인, 최소한 20세기적인, 다시 말해 당신의, 나의, 그리고 영화들의 최고의 요구들을 다 담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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