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에 태어나 1910년대 영화계에 입문하여 1980년 사망할 때까지, 라울 월시의 필모그래피와 그의 사적인 삶은 할리우드의 공적 역사와 그대로 겹쳐진다. 무성 흑백영화(심지어 그는 저 까마득한 이름,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에서 배우로 활약했다!)부터 토키영화와 컬러영화까지, 혹은 웨스턴과 누아르, 드라마와 액션,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그는 영화라는 매체가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과정에 죽 동참해온 산 증인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라울 월시의 영화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른바 거장의 위치에는 결코 오르지 못한, 웰메이드한 영화를 주로 양산하는 영화 ‘장인’의 애매한 클라스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시된 1955년작 <배틀 크라이>는 그의 최고작은 아닐지라도, 아주 소극적인 형태로서의 서플먼트(극장 예고편과 월시의 필모그래피)만이 수록되어 여전히 이 미지의 인물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진 못할지라도, 장인으로서의 라울 월시를 엿볼 수 있는 귀한 기회임에 틀림없다.
영화 입문 전에 선원과 직업 권투선수, 조마사 등의 직업을 전전했던 라울 월시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면 그의 영화들에 대한 어렴풋한 인상이 그려진다. 월시가 만들었던 100편이 좀 넘는 영화들의 목록 중에서 가장 손꼽히는 작품들은 전쟁액션영화 아니면 갱스터누아르들이었다(<화이트 히트>(White Heat), <추적>(Pursued), <목적지, 버마!>(Objective, Burma!>). 라울 월시는 말년에 할리우드의 새로운 트렌드인 ‘응석부리는 듯한 유치함, 궤변만 늘어놓는 유약함’에 염증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주인공과 그의 영화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드 보일드하고 ‘스트레이트’한 정서의 폭발, 땀냄새가 훅 끼치는 강건한 육체의 이미지로 충만할 따름이다. <배틀 크라이>도 예외는 아니다.
뿜빠뿜빠,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요란한 금관악기 사운드의 행진곡이 흘러나오면서 오프닝은 1942년 한창 2차 세계대전의 포화에 휩싸인 미국의 풍경을 보여준다. 눈물 흘리는 연인과 가족들을 뒤로 하고 ‘일본에 함락당한 채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들’을 구하겠다는 이상주의에 부푼 일군의 젊은이들이 해병대로 향한다. 상류층, 하류층, 공부벌레, 벌목꾼, 나바호족, 라티노- 계층적, 인종적 차이를 가로지르는 젊은이들은 ‘효과적인‘ 캐리커처로 제시된다(금발머리에 푸른 눈, 안경을 낀 부르주아 학생, 까만 머리와 야비한 목소리, 도박을 즐기는 라티노, 투박하고 약간 뚱해 보이는 나바호족). 이제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사랑, 끈끈한 전우애와 애국심의 드높은 고양을 경험하며 진정한 해병으로 거듭난다. 남자, (그렇게) 태어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가진 것은 삼지창밖에 없는 족속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라며 격전지를 일부러 자원하는 미군들의 모습, 그리고 나바호족 인디언의 통신암호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는 일본군의 단 한번의 클로즈업(영화 내내 끊임없이 악의 축이자 공공의 적으로 이야기되는 일본군은 정작 화면에는 거의 ‘등장되지‘ 않았다)은 점점 더 이 영화를 보는 각도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하드 보디’를 재확인시켜주는 과거로부터의 소환장이라고 해야 할까?
진정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했다는 자부심과 한치의 의심도 없는 휴머니즘적인 정열로 넘쳐나는, 그리하여 미국 대 (일반화된) 적으로서의 이분법적 구도를 가뿐하게 통과하며 ‘전쟁과 사랑’의 시절을 회고하는 <배틀 크라이>는 그런 의미에서도 역시 대단히 단호하고 강건하다. “승리해야 할 전쟁은 계속된다.” 영화 엔딩 부분에서 내레이터 맥 상사가 지나가듯 던지는 이 대사는 2차 세계대전의 기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리고 포스트 9·11과 포스트 이라크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결코 동일한 감상주의에 젖어들게 하지 못한다. 김용언 mayham@empal.com
Battle Cry, 1995년감독 라울 월시출연 반 헤플린, 알도 레이, 제임스 휘트모어장르 액션화면포맷 스탠더드 2.35:1오디오 돌비디지털 5.1 서라운드출시사 워너브러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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