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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4]
2003-05-09

추천자 : 탐미적이고 어두운 미학적 성취

<사춘기>의 제찬규 감독

김지운 감독

날카롭고 현대음악 느낌의 현과 피아노가 도발적으로 귀를 자극하면서 흑백화면이 열린다. 화면 가득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느릿하게 돌아가고 있고 한 소녀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만화영화 <캔디>의 낭랑한 대사들이 음침한 공간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들린다. 방 안은 온통 이상한 조짐들로 가득하고 텔레비전을 주시하던 소녀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시선은 집 어디선가 들리는 녹슨 파이프관을 따라 흐른다. 모기향 접시에 퍼덕거리며 원을 그리는 나방,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구식전화 벨소리, 방 안 한구석에서 이마에 손을 올려놓은 채 잠을 자는 엄마, 이 모든 것들이 사춘기 소녀의 오감에 불길하게 와닿는다. 아니 소녀를 억누르고 있다. 소녀의 엄마는 한쪽에 축 늘어진 채 소녀를 이 불길함에서 구해줄 능력을 상실한 듯 보인다.

<사춘기>의 공간들은 온통 낯설고 그로테스크하다. 친숙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한 공간인 집과 병원, 병원의 긴 복도와 육중한 엘리베이터, 그리고 택시 안은 최대한 단순하게 공간을 닫아버리고 스멀스멀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이렇게 사춘기의 소녀 앞에 놓인 모든 대상들은 낯설고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존재한다.

지난해 이맘때쯤,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나는 두편의 놀랄 만한 작품을 만났다. 그 한편은 대상 작품이었던 신재인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이었고 다른 한편은 공포판타지 부문 대상작인 제창규의 <사춘기>였다. 우선 신재인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은 기발한 이야기 소재에 엉뚱하고 성숙한 유머를 천연덕스럽고 솜씨있게 비벼놓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모든 감독들을 한방에 보내버렸다(뒤에 알았지만 그에게 매료당한 영화인들이 꽤 있었던 걸로 안다).

이 작품과 마지막까지 대상을 놓고 각축을 벌인 작품이 바로 제창규의 <사춘기 >였는데 나는 극히 현실적인 공간을 어둡고 낯설고 기이한 공간으로 연출해낸 제창규의 탐미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에 매료당했다. 서양화 전공의 미대 출신답게 그는 엄격한 구도와 텍스처의 질감을 세심하고 유려하게 그려나갔다(물론, 미대 출신이라고 다 화면구성력이 뛰어나고 표면재질감을 훌륭하게 그려내는 건 아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바로 텍스처의 표현능력이다. 한국영화 중 단편, 장편 통틀어 최근에 그만큼 텍스처를 뚫어져라 바라본 사람을 못 봤다. 뭐 그다지 별거 아닌 것에 호들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일반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 영화풍경 안에서 신선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물론 그에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면에 세심한 나머지 이야기 전개의 허술함을 낳았고 알레고리의 중첩과 과잉은 모호한 결말을 도출한다. 마치, 그는 관객에게 잔뜩 분위기를 잡아놓고 허둥지둥 알레고리 안에서 이야기를 찾으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뤄어낸 공간의 은밀하고 어두운 세계의 미학적 성취는 더없이 소중하기만 하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지금 그는 촬영감독으로 데뷔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잘 맞는 소재와 감독이라면 금상첨화, 기대만빵이다. 그가 대형 스크린 위에 그려놓을 그림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와 함께했던 촬영, 음악, 편집, 미술을 맡았던 스탭들의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되며 특히 음악을 맡은 임지윤은 왠지 천재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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