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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이의 전주 다이어리 [3]
김현정 2003-05-09

메인 상영관인 전북대 문화관 앞은 늘 관객으로 북적댔다. 4월 27일부터 29일까지는 `희망시장`이라는 이름의 아트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일곱 명의 발레리나> <야간 경비원의 시선> <첫사랑> 세편을 묶은 키에슬로프스키의 다큐멘터리는 부문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극영화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영화들이었다. <첫사랑>은 임신 때문에 서둘러 결혼한 열일곱살 소녀와 스무살 청년의 1년 가까운 시간을 관찰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부부에겐 일상이 드라마다. 사회주의 국가에선 허가를 받지 않으면 할머니집 빈방 한칸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혼인신고를 기다리는 부부가 많아서 빈틈이 날 때까진 결혼도 못한다. 그래도 씩씩하게 살길을 찾아다니는 두 사람은 귀여운 딸을 낳지만, “이 아이는 우리보다 현명할 테니까 우리처럼 되진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신기했던 것은 결혼식장에 온 부모가 “너는 나보다 행복할 거야”, “넌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로 축하해주는 풍경이었다. 딸들이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야!”라고 발악하는 것보단 훨씬 괜찮은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첫사랑>은 아래위가 눌린 채로 상영돼 열일곱살밖에 안 된 야드비가가 엄마가 돼 마땅한 나이처럼 보이는 약점이 있었다. <야간 경비원의 시선>은 권력에 복종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권력은 야비하게 휘두르는 야간 경비원이 설명하는 인생관이다. 그는 규칙을 잠옷처럼 편하게 대하고 좋아하는 것 같지만, 감독의 시선은 경비원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내면을 살짝 드러내면서 흝어내린다.

키에슬로프스키 다음날 선택한 장 외스타슈의 은 외스타슈가 그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앉혀놓고 찍은 다큐멘터리다. 외국관객은 이 영화를 읽어야만 한다. 이야기를 그치지 않아 자막을 읽다보면 할머니 얼굴도 제대로 못 보기 쉽기 때문이다. 외스타슈의 할머니는 어려서 계모에게 구박을 받았고, 집에서 나오고 싶어 서둘러 결혼한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렸고, 4남1녀 중 아들 넷을 모두 앞세워 보냈다. 아이들이 죽은 이야기를 할 때,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이 다 떨어진 것 같단 느낌이었다. 불행했어, 아팠어, 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던 할머니는 “손자 외스타슈가 일은 그만하고 함께 살자”고 했다면서, 이젠 괜찮을 거라고, 십년만 더 살고 싶다고 이야기를 끝낸다. 포스트 누벨바그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되는 장 외스타슈는 을 찍은 십년 뒤인 1981년 자살했다. 그의 할머니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루이즈가 본 미오뜨>와 <긴 여정의 엘레지>는 그런 걱정 근심을 잊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영화들이었다. <긴 여정의 엘레지>는 이름이 주는 범상치 않은 느낌 때문에 평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다큐멘터리다. 제목과 달리 여정은 별로 길지 않지만, 시간은 물리적인 의미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바다와 들판과 하늘과 버려진 마을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소쿠로프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그가 마지막으로 담는 회화들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외치고 싶었던 관객에게 답을 주는 듯했지만, 이미 엘레지에 지쳐버린 뒤라 곰곰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루이즈가 본 미오뜨>도 제목이 주는 연애영화 같은 느낌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영화다. 라울 루이즈는 3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현대 추상화가 미오뜨가 작업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추상화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카메라는 힘차게 캔버스를 휘젓는 붓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거침없는 작업을 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캔버스를 한참 내버려두는 미오뜨는 “삶을 가져오고 싶다. 그것은 갑자기 다가올 것이다”라고 여백의 시간을 설명한다. 추상화가는 붓질 몇번으로 엄청나게 비싼 그림을 그린다고 믿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훈적인 영화였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기사 마감이 닥친 날, 글라우버 로샤의 영화 두편을 봤다. 브라질 시네마노보의 기수였다는 로샤는 외스타슈처럼 요절했고, 블랙스플로이테이션처럼 노래가 설명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바라벤토>에선 두 남자가 싸움을 시작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말리는 것 같더니, 자리를 장만하고 악기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들은 춤추는 것처럼 싸움을 했다. <검은 신, 하얀 악마>에선 느닷없이 죽은 노파가 나오는데, “나의 형제여,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님 손에서 죽은 게 아니에요. 당신의 어머니는 오지에서 총에 맞아 죽었어요”라는 노래를 듣고서야 그녀가 주인공 마누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휙휙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씩, 군대를 끌고 산적을 잡으러다니는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 로샤의 또 다른 영화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의 주인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한번 들은 것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꾼 듯한 노래가 듣고 싶어지기도 했다.

장면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분석하는 일보단 그 영화 자체를 좋아하는 일이 더 쉬울 것이다. 거장의 영화란 무조건 지루할 거라며 피해다니는 건 지루한 영화를 예술이라며 재미있다고 우기는 일 못지않게 편협한 행동일 것이다. 기사를 쓰는 지금, 전주영화제는 사흘이 남았다. 도전해볼 영화가 그만큼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전주영화제의 말, 말, 말 ‥

“영화가 너무 길었다. 반성했다”

일본엔 정신대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정신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우길 수 있는 거다. 아프가니스탄에 잠깐 존재했던 민주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여서, 나는 아프간 민주정권에 관한 다큐를 꼭 찍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영화를 보니까 너무 길었다. 반성했다.

◆ ◆ ◆ 쓰치모토 노리아키, 다큐멘터리 <아프간의 봄>을 찍은 동기를 설명하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 세이는 나 자신과 많이 닮았다. 영화를 보면 세이가 교실에서 국어책을 읽다가 정액이 터지는 경험을 하는데, 내가 바로 그랬다.

◆ ◆ ◆ 도가시 신, 성장영화 <미안해>에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침 상영이라 관객이 열명도 안 될 줄 알고 선물을 준비했다. <침묵의 외침> 자료가 된 비디오 화면을 스틸로 찍어 만든 사진집인데…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에게 주겠다.

◆ ◆ ◆ 안해룡, 다큐멘터리 <침묵의 외침> 무대인사 때 관객이 의외로 많은 걸 보고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늦게 합류해서 주제를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박찬욱 감독이 먼저 선택했다고 해서, 쉽게 내 문제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 ◆ ◆ 임순례, 몸무게와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여고생을 다룬 <그녀의 무게>(개막작 <여섯개의 시선> 중 한편)를 떠올린 계기를 설명하면서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나는 내 영화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 ◆ ◆ 헤르츠 프랑크, ‘다큐멘터리, 오늘’ 부문 상영작 <플래시백> 감독, ‘다큐비엔날레 포럼-다큐멘터리를 넘어서’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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