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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의 거대한 산, 이영일,<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
2003-05-08

올해로 내가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한 지 꼭 10년이 되었고, 한국 영화사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은 이제 4년 남짓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배운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이영일이라는 인물은 영화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은 이 산이 얼마나 넘기 힘든 거대하고 험난한 산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산 증거일 것이다.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은 한국예술연구소가 엮어낸 ‘한국예술아카이브총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자로, 2001년 타계한 고 이영일 선생이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에서 1999년 2학기부터 2000년까지 3학기 동안 한 마지막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강의록’이라고 하는 이 책의 구성방식은 그동안 이영일의 저서에서 보여줬던 한국 영화사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그리고 영화사학자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교육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광으로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영일의 언어는 학자로서의 치밀한 자료 분석과 50년대부터 영화계 안팎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쳤던 경험이 어우러져 후대의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학문적 깊이와 사회, 문화적인 해박함,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으로 한국 영화사를 풀어낸다.

“한국 영화사의 특징은 겉으로 나타난 쟁점과 함께 억제된 쟁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로 서두를 열고 있는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은 후배 영화사가들이 풀어야 할 쟁점을 숙제처럼 제시하고 있다. 이 강의록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제2장인 일제시대의 한국 영화사 부분일 것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고무신과 게다를 집어던지며 극장에서 싸움을 벌이고, ‘신파’가 ‘서민을 위한 예술’로 자리잡았던 일제시대는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열어준다. 일제시대는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만주를 식민지화하면서 아시아에서 국경의 개념은 더이상 의미가 없던 시기였다. 이영일은 이 시기에 활동했던 ‘허영’이라는 영화인을 소개하면서 한국영화의 연구영역을 동아시아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요사이 탈식민주의 영화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동아시아 영화연구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에 초석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강의록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한국 영화사에서 ‘리얼리즘’(사실주의)이 갖는 위치를 재확인한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에서 리얼리즘을 부정하면 밑도 끝도 없게 된다. … 한국의 역사와 현실이 리얼리즘에 있어서만 한국 작가의 감정, 사상을 대상화할 수 있는 실체감과 존재감을 주기 때문이다”라는 강한 어조에서도 보여지듯이 이영일에게 리얼리즘은 한국 영화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위치한다. 이영일은 리얼리즘영화의 계보를 따라 영화사의 정전을 구성하였고, 이것은 젊은 학자들의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강의록은 이영일의 리얼리즘이 우리의 근대를 형성하는 데 주축이 되었던 민족주의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음을 재확인하게 하고, 그의 리얼리즘을 넘기 위해서는 서구의 사실주의 이론이나 양식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이 강의록은 우리 영화사, 아니 우리 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민족주의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담론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지 다시 한번 묻게 만든다.

이영일은 한국 영화사의 에베레스트이다. 감히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높고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유혹의 손짓을 멈추지 않는 산이다. 그러나 이영일이라는 산은 자애롭다. 그는 강의록에서 수많은 쟁점들을 그 산을 오르기 위한 등반로처럼 펼쳐놓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다 다시 길을 잃을 때, 그가 이루어놓은 연구들은 다시 후배들에게 영감의 밧줄을 내려줄 것이다. 후학으로서 내가 할 일은 그 밧줄을 움켜쥐고 씩씩하게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리라. 조영정/ 영화평론가·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