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고택의 요리집 일승암. 그곳에서 맛과 서비스의 전통을 이어오는 젊은 안주인 오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먹듯 간단히 이 만화에 대해 말하라면 이 정도가 적당하다. 사실 그 정도로 충분히 말해줄 수 있는 만화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부족하다.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다.
평면을 배반하는 입체
연재만화의 에피소드 앞에 펼쳐지는 제목 페이지는 그저그런 장식일 경우도 있고, 만화가의 그림 솜씨를 뽐내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본편의 많은 내용을 함축하는 상징의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기쿠치 쇼타의 <오센>(세주문화사 펴냄)에서는 그와는 또 다른 역할, 이 만화의 모호한 성격에 대한 안내판이 되고 있다. 두쪽으로 펼쳐진 제목의 장을 보라. 우키요에(浮世繪)에서 뽑아올린 듯한 훌륭한 평면의 문짝과 기묘하게 기울어진 병풍은 멋들어진 고풍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가운데에 어울릴 만한 인물은 역시 오카노 레이코의 <음양사>에서처럼 동양화의 선으로 빚어진 평면의 존재들일 것이다. 하지만 <오센>은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여주인공의 올록볼록한 몸매와 커다란 눈동자, 조롱에 가까운 입체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배경과 인물이 절묘하게 섞여 들어가고 전통의 요리집 일승암에 초짜 점원으로 들어온 소년 ‘땡글’은 이 식당의 수상쩍은 여주인 오센을 만나게 된다. 20대의 쌩쌩한 외모에 낮부터 술과 요리에 취해 있는 행색이라. 너무 행복하게 태어나 인생의 단맛을 미리 다 본 존재가 풍기는 퇴폐의 냄새이겠지. 그녀도 어쩌면 식당 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요리사와 종업원을 부려먹고 영업에는 폐만 끼치는 <헤븐>(사시키 노리코)의 여주인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요릿집이 위기 상황에 처할 때 그녀는 변신한다. 에도 시대의 미녀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고전적이고 품격있는 자태로 온갖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단칼에 요리해낸다. 과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천하의 일승암 간판 여주인” 오센의 진면목이다.
주류의 펜으로 빚은 독창적 화풍
주인공 오센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 만화는 요리만화에 <미스 헬로우>(고바야시 마코토)와 같은 호스티스 만화의 성격이 강하게 곁들여져 있다. ‘홀 서빙과 주방의 일체감, 일승암의 안팎없는 심오한 경지’라는 점원들의 자랑은 이 만화가 단순히 화려한 요리만으로 다른 요리만화와 대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는 요리만화의 패턴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많지만, 오봉 축제의 미인춤이나 야쿠자 두목의 출산 이야기 등 주인공 오센으로 인해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져 간다. 물론 요리학원의 인기 여강사와의 맛대결과 같은 전형적인 요리만화의 패턴도 없지 않고 조금은 식상한 면모도 보인다.
그러나 <오센>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역시 그 독특한 그림체다. 주인공 오센으로 압도되는 이미지를 조금 비켜서 들여다보면 이 만화의 근본이 1980년대 소년 만화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인물체는 기묘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다. 볼록한 앞뒤 짱구에 역삼각형에 가까운 두상, 정면에서 보면 아주 작고 가는 턱이지만 후측면에서 보면 <짱구는 못말려>를 능가하는 과장된 볼, 그리고 커다란 눈과 솟은 콧날의 ‘꽈리’ 모양의 캐릭터들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호리병 같은 허리 곡선에 거짓말처럼 과장되어 있는 커다란 엉덩이와 같은 몸매를 보라. 살짜쿵 당혹스러움이 지나가면 그 완성도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주류만화와 완전히 어긋나지 않은 곳에서도 이처럼 독창적인 화풍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나?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쿠치 쇼타의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도 슬랩스틱의 액션장면이 적지 않다. 그러한 연출들은 다분히 소년만화의 정형을 따라가기 쉬운데, 이 점에서도 이 만화는 상당히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대나무를 쪼개듯 세로로 과감하게 갈라낸 칸 나눔을 자주 등장시키면서, 이 고풍스러운 요릿집의 동양적 정경과 박력있는 행동의 주인공들을 조화시켜 나가고 있다. 병풍처럼 펼쳐진 칸 속의 인물과 배경은 과감하게 잘려 있는데, 고전적인 여러 소품들 속에서 입체적인 앵글로 튀어나올 듯 서 있는 주인공들의 미묘한 조화가 보는 재미를 더한다. 고풍스런 요릿집을 무대로 하면서도, 결코 그 옛 맛에만 몰두하지 않는 것이 <오센>의 감칠맛이랄까? “옛 민가와 다실의 재건축, 옻칠기와 기모노의 디자인, 어디까지나 평범하기 쓰기 위한 도예”를 열심히 공부하며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만화가의 말을 믿고 싶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