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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살인의 추억>을 보고 무력감에 빠지다

할리우드보다 못한 세상같으니

생각해보니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기간(1986년부터 91년까지)은 내가 양 갈래 땋은 머리에 포플린 스커트를 나풀거리던 중·고등학생 시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마는 언제나 짧게 커트한 머리와 건장한 체격에 <품행제로>의 중필이가 메고 다니던 운동가방을 어깨에 척 걸치고 다녀 험악한 연쇄살인범이라도 지체없이 통과시켰을 그런 소녀 시절을 보냈다. 아무튼)과 얼추 겹친다.

그때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친구들 사이에서 간간이 화제가 되고 또 나의 경우 외할아버지가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동네는 아니었지만 화성군 어디에 살고 계실 때라 ‘다시는 외갓집에 놀러가지 말아야지’(초등학교 졸업한 뒤 한번도 가지 않았지만)라는 결심도 했다. 그러나 연쇄살인사건이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 같아서였는지 특별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떨게 했던 공포의 관심사는 봉고차 인신매매범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비롯한 학생들 대부분은 일종의 사제 셔틀버스인 봉고차를 타고 새벽 등교와 심야 하교를 했다. 당시 인신매매범 기사가 요란스러울 때라 이웃 학교 여학생이 자기네 봉고차인 줄 알고 탔는데 납치를 당했다는 둥하는 소문이 횡행했다.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우리는 학교에만 오면 인신매매범 납치리스트에 한두명씩 추가시켰다. 이제 생각해보면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너무나 영화적이라서 나와는 무관하게 느껴졌을는지도 모르겠다.

십여년이 지난 뒤 영화가 만들어진 다음에야 나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전모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왜 피해자는 다 빨간 옷차림이래, 너무 상투적인 설정이다.” “꼭 비오는 날에 사건이 터진다니, 흐음, 누아르영화라 이거지?” “근데 복숭아는 난데없이 왜 등장하는 거야?” 잘난 척을 하며 나름대로 옥에 티까지 잡으면서 영화를 봤다. 그런데 허걱이었다. 비가 오는 날도, 빨간 옷도, 복숭아 조각도 모두 영화가 아니라 실제상황이었다.

부끄럽지만 <살인의 추억>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본 뒤에야 나는 실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다. 사이트에서 이러저러한 당시의 내용과 증언을 접한 뒤 나는 한심하게도 공포에 질려 컴퓨터를 끄고 방을 뛰쳐나왔다. 괜히 이걸 가지고 이상한 글을 썼다가 지금도 극장가를 유유히 떠다니며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을 변태 범인에게 찍혀 열한 번째 타깃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실은 지금도 무섭다. 아, 이렇게 쓰면 범인이 더 좋아하고 입맛을 쩍쩍 다실 텐데…. 맙소사, 벌써 이런 문장까지 썼으니 틀림없을 거야, 빌어먹을…. 제발 제목이라도 튀지 말게 달아야 할 텐데, 절대 그렇지 않겠지? 젠장).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마이클 무어는 공포는 조작되고, 증식되며, 감염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리는 허구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시스테믹하게 조작된 공포는 사람들을 훈련소의 개처럼 일사분란하게 만들지만,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그저 던져지는 공포는 사람을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마이클 무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할리우드영화처럼 조작되고 조종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상은 할리우드보다 못하다. 할리우드영화라면 <살인의 추억>이 송강호의 그 복잡한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범인이 잡혔을 테니까. 그것이 ‘할리우드식 정의’라 할지라도 언제나 정의는 승리하고 흉포한 연쇄살인범 따위가 딛고 설 땅은 없을 테니까. 범인을 잡기 위해 형사 콜롬보 한명이나 스타스키와 허치 두명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지 30만명의 경찰이 투입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테니까.

<살인의 추억> 홈페이지에 가면 ‘신고센터 119’라는 코너에 관객이 저마다 범인을 유추해놓았다. 윤금이씨 살해사건을 연상케 하는 가해 정황으로 미군이 범인임을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근처 대학의 복학생(그렇게 어려운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건 군대에 다녀왔기 때문일 거라며)이라고, 또 어떤 이는 서양의 점성술과 동양의 민간신앙까지 동원해 역술인, 점성가, 스님 등으로 용의자 신원을 압축했다. 이런 글을 읽는 건 더러 흥미롭고 더러 우습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처량하게 느껴진다. 논쟁의 여지없는, 실로 할리우드적인 절대악이라는 게 현존하며 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할리우드 같지 않아서 인간의 힘이 그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착잡하고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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