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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의 신화, <오세암>

아빠는 어디로 숨은 걸까?</

<오아시스>를 볼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오세암>을 보면서 흘러나왔던 개인적 체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더욱이 라이브액션영화와 애니메이션영화의 차이도 있으므로), 하여튼 다른 관객의 두눈에서도 예상되는 그 눈물은 대체 왜 나온 것일까,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그러자 이 애니메이션의 처음부터 미리 주어진 비극적 설정과 그것을 넘어선 숭고한 종교적 결말의 한가운데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그 모든 것을 체현하는 존재로 서 있었다.

<오세암>은 감이와 길손이 남매가 엄마를 찾아 길을 가고 있는 도중에서 시작한다. 두 아이의 엄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 있기에 그들은 그토록 비현실적인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중에 감이의 기억이 엄마의 죽음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드러내긴 하지만, 앞을 못 보는 그녀의 기억과 달리 혹시 엄마는 그들을 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배경이 언제, 어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오늘날에도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부모들은 실제로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남매가 ‘엄마’만을 찾을 뿐 ‘아빠’는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이와 길손이는 왜 아빠를 찾지 않는 것일까? 만약 원래 원작이 그렇기 때문이라면 원작에서도 왜 아이들은 아빠를 찾지 않는 것일까? 대체 그들의 아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버려진 아이’인가

한국사회(의 이미지에 가까운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버려진 아이’의 신화를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갖고 그려낸 <오세암>은, 그래서 19세기에 집중되어 서구의 근대 아동문학 속에서 오래 전에 등장하여 지금도 잘 알려져 있는 여러 ‘버려진 아이’들을 떠올렸다. 예컨대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1837), 위더의 <플란더스의 개>(1872), 말로의 <집없는 아이>(1878)와 <집없는 소녀>(1891), 아미치스의 <엄마 찾아 삼만리>(1886), 버넷의 <소공자>(1886)와 <소공녀>(1888),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1908) 등등등.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취한 이 소설 속의 어린이들(어느 정도의 나이 차가 있긴 하지만)은 어떤 상황으로 부모로부터 또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거나 헤어지게 되고 나서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비정한 현실을 헤쳐가며 살아가기도 하고,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부모 중 누군가를 찾아 역시 힘든 여행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 그 과정에서 그려지는 어린이 주인공의 모습은 거의 한결같이 너무나 착하고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용감하고 너무나 정의롭다. 게다가 어른보다도 훨씬 더 어른스럽기까지 한다. 여러분 중에는 예의 소설들을 그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 시절에 읽으면서, 또는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을 때도 어떤 인간적 위화감을 느낀 적이 없는지?

실은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의 <아동의 탄생: 가족생활의 사회사>라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중 ‘아동의 발견’을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오늘날의 ‘어린이’는 19세기 자본제 국민국가에서 어른이 어른일 수 있기 위해 필요로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그때 같이 등장한 아동문학(특히 낭만주의 문학)은 ‘현실의 어린이’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우리가 흔히 품고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와 개념을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즉 ‘어린이’라는 것 자체가 ‘문학’이었다(국민=민족이라는 것도 문학이었다고 말해지듯). 그런 ‘어린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현실의 어린이’는 사실 ‘작은 어른’으로서 취급되고 있었다.

한편, 위에 언급된 ‘버려진 아이’의 소설들은 대부분이 일본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닛폰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세계명작극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1975년 <플란더스의 개>부터 1997년 <집없는 아이 레미>까지 TV시리즈를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플란더스의 개>와 <엄마 찾아 삼만리>(1976)는 각각 1996년, 1999년에 극장판 장편으로 새롭게 제작되기도 하였다. <집없는 아이>는 데자키 오사무 연출로 TV시리즈(1977~78)와 극장판 장편(1980)으로 만들어졌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겠지만, 이 TV시리즈들은 모두 한국에서도 방송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점은, 일본에서 그토록 사랑받으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19세기 유럽의 유명 아동소설들이 정작 유럽에서는, 그리고 미국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있다손 치더라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당장 디즈니를 떠올려보자. <올리버 트위스트>를 원작으로 한 장편(1988)을 제외하면, 디즈니는 그 소설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적이 없고, <올리버 트위스트>도 뉴욕을 배경으로 한 동물 버전의 유쾌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었다. 디즈니는 고아를 등장시킬지라도 그/그녀를 둘러싼 비정한 인간사회의 현실을 그릴 생각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서구사회에서는 아동소설들 대부분이 라이브액션영화로 만들어졌다(가령 셜리 템플 주연의 <소공녀>, 캐롤 리드 감독의 <올리버!>, 릭 슈로더 주연의 <소공자>). 왜일까? 아마도 그 소설들이 환기하는 19세기의 현실이 서구사회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었던 현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꿔 생각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렇게 오랫동안 19세기 서구의 현실을 배경으로 많은 ‘버려진 아이’들을 그려냈던 것은, 그 모두가 결국 일본사회에서는 스스로의 현실과 무관한 또 하나의 판타지, 즉 일본사회가 욕망하는 서구사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만화영화 속의 어린 유럽인들은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중에도 지저분해지거나 추해지기는커녕 매주 피부 관리를 받은 듯 하얀 피부에 컬러 렌즈를 낀 듯한 예쁜 눈동자를 언제나 보여주었다.

우리 스스로의 거울 이미지

한편, <오세암>처럼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버려진 아이’를 그린 작품이 이제까지의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똘이 장군>(1978)도 그것에 해당하는 초기의 사례일 수 있지만, 대영제국 작가 키플링의 <모글리>와 미국 작가 버로스의 <타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소년 장군 모모타로의 양자인 똘이는 미국을 대신하여 북한을 제압, 해방하는, 1970년대 말 남한사회의 포스트식민지적 표상일 뿐이었다. TV애니메이션 <떠돌이 까치>(1987)라든가 <달려라 하니>(1988)에 와서는 한층 사실적으로 바뀌었지만, 역시 1980년대의 프로야구 열기와 88올림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서, 까치도 하니도 먼 길을 떠나기보다는 모두 운동장 안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실은, <오세암>을 만든 마고21의 제작진이 이미 그 전작 <하얀마음 백구>(1998∼2000)에서 이른바 실화에 기초하여 ‘버려진 아이’의 동물 버전을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바 있다는 것이다. <하얀마음 백구>가 선진국 진입의 섣부른 꿈이 실패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하의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전 ‘근대의 초극’을 논하며 제국을 꿈꾸다 패망한 일본의 미 점령군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버려진 고양이 도라장>(1947)을 환기시킨다. 이 작품 이후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명작극장까지 포함하여 줄곧 그려온 ‘버려진 아이’는 요컨대 패전, 그리고 천황의 인간 선언이라는 집단적 체험을 통해 부모를 상실한, 그래서 새로운 부모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인 스스로의 거울 이미지였다.

이와 비슷한 이유에서 한국의 성인세대가 2003년의 <오세암>에서 그려낸 남자 아이 길손이는 엄마는 그토록 마음을 다해 애타게 찾으면서도 아빠를 찾지는 않는다(반면에, 여자아이 감이는 이미 거세된- 눈 먼 존재로서 엄마도 아빠도 찾지 못하고 찾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에게는 새로운 스타일의 아빠가 나타나준다. 바로 젊은 스님이다. 눈썰매를 신나게 타는 길손이와 함께 스노보드를 즐기듯 21세기의 감각으로 연출된 이 자상하기 그지없고 타락하지 않는 스님의 모습은, 아마도 오늘날 서른을 넘긴(?) 한국 남자아이들이 욕망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되고 싶은 아버지의 이미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속세를 떠난 스님이라는 사실은, 거꾸로 그런 이상적인 아버지는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일 때문에 같이 잘 놀아주지도 못하다가 결국 아이에게 너무 늦게 도착한 스님의 슬퍼하는 모습은 ‘현실의 실패한 아버지’들을 위한 변명이 아닐까? 물론 이상적인 아버지의 세속적 모델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광고 속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축구선수(그의 이름이 유니폼에 ‘KIM’이라 쓰여져 있는)를 끌어안고 격려하는 멋진 히딩크를 곳곳에서 마주치다보면, 현재 한국사회가 가장 사랑하고 싶어하는 새로운 아버지의 세속적 모델은 혹시 그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게 한다.

길손이가 마음을 다해 찾는 엄마에 관해서도 생각해보면, <오세암>이 (원작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잃어버린 모성에의 갈구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과의 합일이라는 숭고한 차원으로 끌고 나아가지만, 과연 ‘현실의 (아시아인) 어머니’를, 아니 ‘현실의 (아시아인)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긍정하지 않고서 ‘진정한 어머니’를 찾는 것이 가능한 일일지? 영화 속에서 친절하게 음식을 나눠준 엄마 같은 중년 여성을 누나 감이가 “아, 그 뚱뚱한 아주머니”라고 일컫자, 길손이는 “아냐! 뚱뚱하지 않아!”라고 항변하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길손이의 목소리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뚱뚱하면 어떻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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