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식, 변희봉, 윤여정…. 우리는 이들을 새로 발견했다. 어린시절부터 텔레비전에서 구수한 할아버지로, 잘 나가는 꽃미남으로, 말 끊이지 않는 깐깐한 아줌마로 친숙했던 이들, 지금은 ‘중견’을 넘어 베테랑 탤런트가 되어 있는 이들이 올 한국영화계를 융단폭격하고 있다. 충무로엔 “텔레비전 ‘노인’들의 스크린 역습”이라는 말까지 유행이다.
‘내공’을 갖춘 고수들은 기존의 이미지를 업는 것도, 감초 역할도 사양했다. 새롭고 독특한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한 젊은 남녀가 나와 뽀뽀만 하던 영화의 시대를 지나, ‘감독영화’라 부를 만한 작품들을 내놓는 비교적 젊은 감독들이 등장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종의 ‘텔레비전 세대’였던 이 감독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같은 욕지거리를 해도 삶의 냄새가 묻어나는 ‘1급의 연기’를 원했고, 스스로 팬이었던 중견 탤런트들에게서 그 해답을 찾아냈다.
지난달 <지구를 지켜라>의 강만식 사장, 백윤식씨가 던진 충격은 예사가 아니었다. 드라마 <서울의 달> <파랑새는 없다>가 깊이 심어준 인상을 떠올려보라. 그의 연기는 뻔뻔스런 사깃꾼을 할 때도 진짜 악인이라기보다는 참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인생의 허풍 같아 연민을 일으키는 구석이 있다. 그 얼굴 때문에 영화를 보며 한순간 강사장이 측은해지려고도 했다. 지하주차장에서 술에 떡이 된 채 흘리던 외계인의 음성, ‘미친 녀석’ 병구에 끌려가 머리 깎이고 빨간 사각팬티와 레이스 달린 속옷만 입은 채 결사적으로 탈출하려던 절규, 백씨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러닝타임을 꽉 채웠다.
“액션부터 시작해서 감정기복이 심하잖아요, 연기자들이 필요로 하는 감정이 다 들어갔더라고. 쭉 해왔던 연기 인생의 정점에서 나를 뒤돌아본다는 느낌이었죠.” 그는 현재 차기작을 검토중이다. “<지구…>는 특별한 케이스였지만 우리 영화엔 중견·젊은 연기자들의 대립각을 세운 작품이 별로 없어요. 우리도 좀 다양해져야 하는데….”
새까만 얼굴에 연필에 침 묻혀 가며 글씨를 힘겹게 써가던 <선생 김봉두>의 최노인이자 <살인의 추억>의 초반부 사건현장에서 멋진 미끄러지기를 보여주는 구식복덕방 주인 같은 구반장, 변희봉씨. 성우로 출발해 1970년부터 연기를 한 그는 텔레비전에선 “대부분 <수사반장>이나 의 도둑놈, 노인, 간첩, 점쟁이역”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라. 튀어나온 턱과 눈, 그 눈을 동그랗게 뜰 때의 기이하고 독특함은 작은 텔레비전 화면이 아니라 커다란 스크린에서 본색을 발휘한다. “방송과 똑같은 역만 들어와 절대 영화는 안 찍는다 하고 있”던 변씨는 열렬한 팬이었던 봉준호 감독의 집요한 꾀임에 십수년 만에 <플란더스의 개>를 찍었고 <살인의 추억>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방송은 순발력이잖아. 영화에 와서 처음엔 밖으로 표현 못했지만 속으로 힘들었어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랑 작업한 게 정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요즘 정말 훌륭한 감독들이 많더라고. 난 아무리 영화가 상업적이라도 꼭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감독들에게 그걸 말해요. 조연만 해서 그런가, 수십년이 지난 요즘에야 연기가 뭔지 조금 알 것 같다니까.” 한없이 겸손한 그는 <불어라 봄바람>(장항준 감독)에서 노작가로 변할 예정이다.
완성돼 개봉을 기다리는 <바람난 가족>에서 윤여정씨의 연기는 벌써 소문이 자자하다. 언제나 할 말 다하는 ‘정론직필’형의 그는, 영화 출연 소감을 물을 때도 그랬다. “젊은애들이 왜 영화 하다가 텔레비전 안 하겠다는지 알겠더라고. 영화는 감독이 하루종일 붙잡고 연습시켜 1~2장면 찍잖아. 그거 못하면 연기 관둬야지.”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까지 온 가족이 바람을 피우는 이 대담하고 섹시한 가족 이야기에서 그는 평생처음 육체와 감정의 요구를 솔직히 인정하고 바람을 피우는 예순살 여인 ‘홍병한’이 되었다.
윤씨는 억척스런 아줌마이거나, 도시적 여성이거나, 생의 무게에 어깨 돌리던 홀로 된 여인이거나, 아니면 그저 보통의 어머니일 때도 흔한 ‘한국의 어머니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른 이의 쓸쓸한 인생을 위안하던 그의 연기를 보며, 자기 안의 욕망을 내놓고 말하는 연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도 “맨날 밥상 차리고 눈물 짜는 역이면 안 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꼽아야 할 이들은 아직도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경상도 사투리 진하던 반장 송재호씨, 그가 <이중간첩>에서 악랄한 고문에도 맑은 얼굴로 신념을 지키던 북한 고정간첩역을 했을 때의 존재감은 어땠는가. 비교적 영화에 자주 출연해왔지만 김인문씨도 <바람난 가족>에선 ‘김기영 감독보다 더 변태 같은’ 임상수 감독을 만나 “특유의 하이톤의 쇳소리는 금지당한 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식칼’든 김자옥씨나, <오! 해피데이>에서 정말 ‘기∼인’ 육두문자 애드리브를 날리는 김수미씨는 출연시간이 짧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주목할 만한 건 관객의 주요층인 10~20대도 그들에게 환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그것을 “정말 좋은 연기를 볼 때 얻는 쾌감일 것”이라 말했다. 그의 말대로 관객들은 한국영화를 볼 또 하나의 ‘행복한 이유’를 찾은 셈이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말하는 백윤식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백윤식씨의 팬이었다며 추천했다. 아, 그렇지, 나도 팬이었는데. 개성이 정말 강한 연기자다. 작업하며 놀란 건 많이 열려 있다는 거다. 배역에 접근하는 것도 젊은 연기자보다 더 분석적이다. 기존의 이미지나 쉽게 갈 수 있는 부분 등 자신의 메리트는 전혀 생각 안 한다. 오히려 버리려고 하더라. 캐릭터를 많이 만들어내는 스타일이랄까. 편집할 때 잘라낼 장면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전체 느낌을 보고 계산해서 연기를 배치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초반엔 물론 힘들었다. 그는 테이크 세번 안에 해결하는 연기에 몇십년 동안 익숙했으니…. 본인도 세 테이크 안에 다 뿜어버리니까 여러번 가면 에너지가 좀 떨어진다고 할까, 하지만 금방 적응하더라.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이 말하는 변희봉
변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 그 밑에서 조명을 친다, 그 이미지로 <플란더스의 개>의 아파트 관리인 역을 만들어냈다. 그 영화에 혼자 10분 가까이 보일러 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로 빽빽하게 2~3장 되는 양을 스님이 불경외듯 줄줄 해내는데 정말 공력이 느껴지더라. <살인의 추억>의 반장역도 애초부터 변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 작품에 어찌나 애착이 강한지 “봉감독, 이 반장 그냥 죽 가면 안 될까” 말도 하시고, 촬영분이 끝났는데도 현장엘 직접 찾아왔다. 잘 보면 후반부에 그냥 화면을 지나가는 사람 중에 변선생님의 모습이 보일 거다. 지금 세번째 영화의 시나리오를 마쳤는데, 그 영화에도 변선생님을 등장시키려고 한다. 이번엔 선생님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줄 거다.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이 말하는 윤여정
병한역은 연기자들이 맡기 몹시 꺼려했다. 텔레비전에선 볼 수 없는, 한국사회에선 금기시하는 이야기를 뻔뻔스레 해대는 주인공인 셈이니. 캐스팅 당시 윤여정 선생님이 1순위는 아니었다. 근데 생각 이상이었다. 첫 촬영날 엄청난 대사를 2~3번 만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게 했다. 사실 난 탤런트에 대해 선입견이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늘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근데 선생님과 작업을 하며 일종의 감동을 받았다. 주요 무대가 텔레비전일 뿐이지, 여전히 새 역할을 꿈꾸고 도전하는, 말 그대로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바로 다음 작품에 역할을 만들어서라도 출연시킬 생각이다. 내가 평생 영화를 만들다면 계속 함께하고 싶다. 김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