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유명해져버린 탓에 마치 전설 속의 화석처럼 느껴지는 실존인물들이 분명히 있다. 베르너 헤어초크가 2001년 실로 오랜만에 <인빈서블>로 베니스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몇몇은 심지어 “어? 헤어초크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어?”라는 반응까지 보였으니 말 다했다. 뉴 저먼 시네마의 흐름 속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던 헤어초크의 대표작들을 다시 한번 본다는 것은, 당대에도 희귀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희귀해져버린 영혼의 스펙터클을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낯선’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번에 출시된 <베르너 헤어조그 컬렉션>은 <노스페라투> <피츠카랄도> <버든 오브 드림즈>(<피츠카랄도>의 촬영현장에서 찍은 다큐멘터리), <나의 친애하는 적>(클라우스 킨스키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 총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르너 헤어초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 클라우스 킨스키와의 협업작품들로 이루어진 이번 박스세트는 <아귀레, 신의 분노>와 <보이체크> <코브라 페르데> 등은 제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애증에 얽힌 관계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도저히 아무도 그와는 제대로 된 영화를 찍을 수 없다는 악명을 떨쳤던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는 베르너 헤어초크와 함께할 때에만 배우로서의 최고 정점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토록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면서도 이상한 상호존경의 태도를 유지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카메라 렌즈 속으로 녹아들어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디게 한다. 헤어초크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지점들을 떠올려보라. 죽음을 앞두고 오히려 격렬해지는 생의 충동(<노스페라투>에 등장하는 꿈결처럼 매혹적인 ‘죽음의 춤’ 장면), 꿈을 위해서라면 산도 옮겨놓을 수 있는 사내들의 집념, 인간들의 아등바등하는 희로애락을 무참하게 짓밟는 ‘숭고한’ 자연의 압도적인 풍광, 제국주의의 불편한 냄새가 이카루스의 불가능한 꿈과 결합할 때 배출되는 이상한 끈적거림(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나 V. S. 네이폴의 몇몇 작품들보다 더욱 동물적으로 진한 체취)… 클라우스 킨스키는 울퉁불퉁한 얼굴의 한 군데 꿈틀거림만으로 혹은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의 잠깐 움직임만으로 헤어초크의 광적인 열정을 그대로 체현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의 분노’이거나 ‘꿈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위대하고 서글픈 갈망이다.
애초에 베르너 헤어초크와 클라우스 킨스키, 두 ‘미친놈’의 열광적인 카니발을 기대했던 짓궂은 마음은 한편한편 디스크를 넘기면서 점점 차분해진다. 예상외로 너무 멀쩡하고 온순하게 생긴 베르너 헤어초크의 솔직한 코멘터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선정적인 호기심보다는 물적인 토대를 초월하는 비상을 꿈꾸었던 어떤 이름들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까 헤어초크 자신이 이카루스이자 시시포스이자 아귀레, 드라큘라 백작, 피츠카랄도였던 것이다. 스스로의 신화를 구축하여 ‘우리에게 부재하는 이미지’들을 보충함으로써 영화의 유산에 이바지하고 싶어했던 열정, 또는 “세상에 악마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 <피츠카랄도>의 촬영현장에 있을 것이다”라며 이 영화를 마치면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으리라 이를 갈던 헤어초크가 다음 순간 “나한텐 아직 꿈이 있어요. 단 한번만이라도 무르나우나 도브첸코, 그리피스처럼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그토록 한 인간의 영혼을 꼼짝없이 사로잡은 영화라는 놀라운 판타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PS: <버든 오브 드림즈>의 스페셜 피처 중 유머러스하고 신랄한 기록영화 <헤어조크 구두를 먹다>를 놓치지 말자.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돈이 없다구요? 그럼 카메라와 필름을 훔치세요”라며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구두’ 요리를 즐기는 헤어초크의 표정은 백문이 불여일견! 김용언 mayham@empal.com
<노스페라투>(Nosferatu: Phantom der Nacht, 1979) 출연 클라우스 킨스키, 이자벨 아자니, 브루노 간츠
<피츠카랄도>(Fitzcarraldo, 1982) 출연 클라우스 킨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DVD 화면포맷 와이드스크린 아나모픽 1.85:1오디오 돌비디지털 5.1 & 2.0 서라운드
<버든 오브 드림즈>(Burden of Dreams, 1982)감독 레스 블랭크 출연 베르너 헤어초크, 클라우스 킨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DVD 화면포맷 스탠더드 4:3, NTSC 오디오 돌비디지털 2.0 모노
<나의 친애하는 적>(Mein liebster Feind - Klaus Kinski, 1999) 출연 베르너 헤어초크, 클라우스 킨스키DVD 화면포맷 와이드스크린 아나모픽 1.77:1, NTSC 오디오 돌비디지털 2.0출시사 알토미디어
▶▶▶ [구매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