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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후 안하는 아시아인이 등장했다
2003-04-29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 사는 미국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늘 백인 중심 주류사회의 생각과 문화를 대변해왔다. 그래서 흑인 및 라틴계는 마약밀매자, 도심의 갱스터, 악당 등 한정된 이미지로 다루어지기 일쑤다. 그렇다면 미국 내에서 아시아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할까. 우선 사회 전반적으로 보면 아시안 아메리칸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특히 교육열이 높은 모범 시민집단으로 여겨진다. 특히 한국인, 중국인들이 몰려 사는 캘리포니아에선 아시아 학생 비중이 높은 학교들이 성적이 높은 우수학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 미국인들에게 아시아인 학생들은 어려운 수학과 과학에 뛰어나고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 입학을 위해 공부에 열올리는 범생이들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선 불행하게도 아시안 아메리칸은 영화 속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 배우=쿵푸 액션’이란 공식이 굳건히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 개봉한 <내일은 운수대통> (원제 Better Luck Tomorrow)은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이 이중의 상투적 이미지를 과감히 깨뜨린 영화다. 8살때 대만에서 캘리포니아로 이민와 UCLA 영화학교에서 수학한 저스틴 린(31) 감독이 25만달러로 만든 저예산 독립영화로 선댄스영화제에서 열띤 논쟁을 일으키면서 주목받기 시작, 아시아계 감독과 주연배우들로 만들어진 영화로선 최초로 메이저 영화사 배급을 따냈다. 흥행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어 그동안 인구가 많은 흑인, 라틴계에 비해 시장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온 아시안 아메리칸 시장을 겨냥한 영화제작의 물꼬를 트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기대를 낳고 있기도 하다.

우선 이 영화가 다른 점은 주인공 및 출연진이 거의 모두 아시안 아메리칸들이고, 이른바 범생이로 일컬어지는 아시아계 학생들의 얌전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었다는 것.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부촌에 사는 고교 우등생인 벤, 버질, 데릭, 한 등 네 명의 주인공은 모범생이기 때문에 의심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조금씩 탈선행위에 젖어들게 된다. 처음엔 커닝 페이퍼를 만들어 몰래 팔고, 컴퓨터 기자재를 훔쳐 팔아 돈버는 일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면서 마약밀매에 손대게 되고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지난 93년 실제로 오렌지카운티의 명문 사립고 서니힐스의 우등생 5명이 집단으로 중국계 학생인 스튜어트 테이 군을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한인학생들도 연루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등생 살인사건’이란 별칭으로 주민들에게 뚜렷이 기억되고 있다.

또 다른 점은 아시아인 배우들이 상투적인 액션배우가 아닌 현실 속의 인물들, 깊이를 지닌 인물들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시아인들이 주인공이지만 영화가 다루는 청소년 문제는 인종을 초월한 보편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요즘 중상류층 청소년들이 왜 갱스터문화를 모방하는가에 대해 탐구하려 했다. 아시안 청소년들이 이런 맥락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갱스터처럼 총을 들고 주변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는 점이 이들에게 짜릿한 파워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로스앤젤레스/이남·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