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라는 매체의 확산을 기반으로 수많은 시네마 키드들이 생산되던 90년대 초반, <전함 포템킨>을 만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노스텔지아>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소련영화, 아니 영화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소련영화를 본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92년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국은 노태우의 권위주의 정부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라서 그 두 감독의 작품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들은 추적이 불가능한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시네마 키드들의 손에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영화들은 비록 여러 번 녹화를 뜨는 과정에서 최악의 화질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구했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은 조그마한 TV를 통해 흔들리는 화면으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른바 영화를 시와 철학의 경지에 올려놨다는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비디오라는 매체와는 그리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빠른 전개와 확실한 갈등구조 그리고 역동적인 편집술로 인해 보는 이들을 비디오 화면 속으로 빨아들이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차이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경험을 하는 시네마 키드들이 늘어나면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이 <유랑극단> 등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들과 함께 ‘수면제’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희생> <노스텔지어> 등이 극장에서 상영되자, 그런 화려한(?) 명성을 확인하려는 많은 이들이 극장을 찾아 뉴스가 되기도 했을 정도다.
72년작 <솔라리스>의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오른쪽) <솔라리스>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램.(왼쪽)
우주공간에서 죽은 자신의 아내와 만나는 주인공 캘빈을 연기한 조지 클루니.
<솔라리스>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덜 ‘수면제’라고 평가받았던 작품이다. 비록 할리우드의 스펙터클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에 대한 소련 영화작가의 화답’이라는 평가만으로도 어느 정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더욱이 내용이 일반적인 이들의 관심을 끌 만큼 보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이벤트 호라이즌>과 같은 영화나 <콘택트>와 같은 소설에 영감을 주었고 드디어 스티븐 소더버그에 의해 리메이크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솔라리스>가 폴란드 출신의 SF작가인 스타니스와프 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21년 태어난 그는 2차대전이 끝난 1946년에 <화성에서 온 사나이>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SF소설들을 쓰기 시작했고 1961년 대표작인 <솔라리스>를 출간하면서 전성기를 시작해 30여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비영어권 SF작가로는 최고의 인정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1972년 타르코프스키에 의해 영화화되어 개봉된 <솔라리스>에 대해서, 램이 극도로 많은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20세기 폴란드 문학의 최대 히트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자신의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하지 않고, 기본적인 설정을 차용해 다른 이야기의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 그래서 1972년 타르코프스키가 이 영화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을 때도, 그는 영화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런데 불만은 램만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SF와는 거리가 멀었던 타르코프스키도 처음부터 소설이 가지고 있는 약간 소프트한 설정과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자신의 스타일로 스크린 위에 그려내려 했는데, 제작과정에서 램의 불평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마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들 중 <솔라리스>를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난 2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램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대해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우주공간에서 무언가 놀라운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 반면, 타르코프스키는 불편한 우주공간에서 빨리 빠져나와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했다.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마차를 끄는 말의 입장이었던 셈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소더버그의 버전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도 “소설 <솔라리스>는 인간의 다층적인 면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그런데 소더버그는 너무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집중을 한 것이 아쉽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단순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여전히 할리우드의 일반적인 관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라고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자신의 원작에 대한 애착이 아주 대단한 것이다.
원작자에게 그런 평가를 받을 것임과 흥행에서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할 것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제작자인 제임스 카메론의 개인적인 애정에 기인한 바가 크다. 처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접했을 때 일종의 정신적 충격을 받은 그는, 램의 소설에도 완전 매료되어 할리우드판 리메이크의 제작을 ‘드림 프로젝트’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완성시켰고, 자신의 분위기가 풍기는 소더버그의 SF를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스타니슬와프 램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yberiad.info/english/main.htm
<솔라리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olaristhemovi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