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열증의 만화경
모니카 벨루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라빠르망>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딱 한 가지, 모니카 벨루치와 함께 출연한 로만느 보링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새비지 나이트>에서 로만느 보링제를 본 이후 나는 줄곧 팬이었다. 그런데 <라빠르망>에서 꿩 대신 공작을 본 나는 그 즉시 벨루치로 신발을 바꿔 신었다. <돌이킬 수 없는>을 보기로 한 것도 순전히 벨루치 때문이었다. 나는 벨루치가 우아한 프랑스식 수다에 둘러싸인 고고한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라빠르망> 같은 영화를 상상하며 표를 끊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면서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일단 알파벳을 역순으로 배치한 자막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화면도 몹시 흔들렸으며, 대사는 술주정뱅이들이 싸우는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한마디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자극이 두서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환각의 상태를 그대로 화면 위에 옮겨 놓은 듯했다. 원근법의 시각적 습관과 선형적 청각 습관을 가진 나는, 영화가 뱉어내는 정신분열증의 만화경이 지독히 낯설었다. 게다가 게이 바 렉텀(rectum)에서 진동하는 피와 정액의 비린내는 참기 힘든 이물감마저 주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보고 듣고 느끼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은 명확하다. “당신의 시각 습관으로 이 영화를 보면 어지름증에 걸릴 것이다. 당신의 청각 습관으로 이 영화를 들으면 이명 증세를 느낄 것이다. 향수에 익숙한 당신의 후각으로 이 영화의 냄새를 맡으면 비싼 저녁을 다 토해낼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끝까지 보려거든 신체적 불쾌함을 참든지 아니면 지금 나가라.” 감독의 의도대로 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도에서 강간당하고 폭행당하는 장면에서 몇몇 관객은 자리를 떴다. 하지만 나는 관객모독의 불쾌함을 참고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영화를 거부하고 관객을 투시하고 해체해버리겠다는 이 엄청난 선언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기어코 보기 위해.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자리를 뜨는데 20대의 한 남자 관객이 혼자서 상소리를 했다. 그 옆에서 누군가 맞장구쳤다. 나는 그냥 멍멍했다. 이 영화가 뱉어내는 소란스런 주장들은 여러 차례 술집을 순례하고 마지막에 쏟아낸 토사물 같았다. 각기 음색이 다른 목소리가 얽히고 설킨 술주정뱅이의 복화술. 그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딱 두 가지 음색밖에 없었다.
첫 번째 목소리는 “영화 그렇게 만들고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돼”였다. 할리우드 영화 관습을 조롱하기 위해, 그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과 귀를 괴롭히기 위해, 그는 그렇게 어지럽게 카메라를 돌려댄 듯했다. 그에게 하나의 고정된 관점에서 사물을 투시하는 원근법은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 대상을 저격하는 사악한 관음증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그는 폭력과 섹스라는 관음의 대상을 관객의 코앞에 들이미는 방식으로 훔쳐보는 자의 소재를 폭로한다. 9분간에 걸친 지하도의 강간장면, 게이 바에서 둔기로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을 거듭거듭 보여줌으로써 그는 폭력과 섹스의 더블버거를 포식하라고 권한다. 너희들은 관음 중이며 너희들의 시선이 욕망하는 게 결국은 이거 아니냐는 어투다. 나는 이 지점에서 감독에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게 나쁘다고 한손으로 성경을 흔들어대면서 다른 손으로는 더블버거를 열심히 팔고 있냐? 폭력과 섹스를 과장하면서 피학적인 고뇌의 제스처를 취하면 밀매의 혐의에서 면책이 된다고 생각했나? 그게 전략이라면 당신은 상업의 천재다.”
내가 들은 또 하나의 목소리는 “삶을 그렇게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설명하려 하면 안 돼”였다. 첫 장면에서 딸을 강간해 감옥에 갔다온 남자는 친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너무 귀여웠어”를 연발하며 자신의 행동이 불가항력적이었다고 탄식한다. 생의 근원적인 욕망을 근친상간을 통한 단성생식으로 가정하는 극단적인 환원은 모든 성적관계의 사회적 차이를 무화시킨다. 근원을 상실하고 고립된 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서사를 포기하고 파편적인 쾌락의 증식을 추구하는 전략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사랑도 쾌락을 최대화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해진다. 지하철에서 어떻게 하면 여자를 오르가슴에 올릴 수 있냐는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남 걱정 말고 너 스스로 먼저 느끼라고 한다. 감독은 섹스를 서로의 육체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소통되지 않는 쾌락, 그럼에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쾌락을 껴안고, 그는 마침내 쾌락과 쾌락이 소통된다는 환각에 빠진다.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이 침대에서 서로 침을 뱉으며 농탕치는 장면이 바로 그 환각이다. 이 사랑은 애초에 환각이었으므로 잠시도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감독은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통탄한다. 환각의 순간 속에 영주하고자 하는 자에게 흐름은 공포이며, 세계는 오물덩어리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이 오물의 흐름에서 탈주하기 위한 맹목적인 역류의 의지를 불태운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고, 지하도로 기어내려가서 항문을 파고들 만큼 역류하고 싶은 의지.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감독은 그 사이에서 아주 교활한 방식으로 방황한다. 다만 쾌락을 재생산하기 위해 그는 위악과 고뇌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는 지사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노예처럼 사고한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