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만 나면 한국을 방문해 풍습과 지리를 익히는 일본 친구가 있다.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일본의 신문사에서 일하는 이 친구와는 한-일간의 민감한 화제도 솔직하게 터놓는 사이다. 그런데 한번은 이 친구와 이야기하다 당황했던 적이 있다. 화제는 우연히도 ‘군대위안부’였다. 그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해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벌써 잊혀진 과거가 아니냐” 하고 반문했을 때 당황했던 것은,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자는 뉘앙스가 들어 있는 발언 때문이라기보다 그게 사실이 돼가는 현실 때문이었다.
일제는 시골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갖은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겨우 열다섯이 됐을까 말까 했던 할아버지의 여동생은 군대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서 낯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늦게 결혼했더라도 끌려갔을 거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자라면서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는 하나같이 생생해서, 어릴 적 나에게 일제 치하의 일은 교과서에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역사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냥 잊혀진 과거로 치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만행은 아직도 각 가족의 역사에서 살아 숨쉬는 현실이라는 것을 그 친구에게 강변하면서도 어쩐지 떳떳하지 못했다.
2003년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단편부문 본선에 진출한 한남식의 <붉은 나무>는 이제는 잊고 싶은,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일제 치하의 아픔을 소름끼치도록 잘 묘사해냈다. 10분30초가량 펼쳐지는 이 작품은 대사도 없이, 군대위안부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홍신자의 목소리가 섬뜩한, 황병기의 <미궁>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우리의 딸들은 시뻘건 구렁이에 휘감겨서 짓이기고 파멸되어간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소복 입은 소녀들이 여전히 슬프게 서 있는 이 땅. 같은 한반도인 듯싶은데 어딘지 다르다. 시간은 과거를 지나 현재로, 다시 미래로 가는 중인 듯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날렵하게 생긴 로봇들이 한반도 위에 하얀 저고리 입고 서 있는 소녀들을 삼켜버린다. 후반부에 흐르는 것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 정확히 부르는 소녀의 음성을 듣노라면 슬퍼진다.
2D와 플래시 기법으로 만들어진 <붉은 나무>는 섬뜩하고 충격적인 메시지를 초현실적으로 펼쳐낸다. 대사나 현란한 장면전환 없이 절제된 사운드와 표현기법으로 주제를 압축해낸 것도 인상적이다. 애니메이션을 배운 적도 없이 오로지 독학으로 2년 동안 작품을 제작한 작가는, 군대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와 <빼앗긴 순정>을 그린 강덕경 할머니를 통해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무런 힘도 없이 끌려가야 했던 군대위안부의 눈으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슬픔, 그리고 미래의 히스테리성 역사관을 묘사하고자 했다”고 제작 동기를 밝히는 작가는 공장과 건설 인부 등을 전전하며 <붉은 나무>를 완성했다. 애초부터 국제 페스티벌에 진출해서 한국의 아픈 역사를 알리고 싶었다고. 작가의 의도대로 보고 있자면 너무 아픈 작품이다.
미국이 침략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반전을 부르짖던 국가들도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군침을 흘리고 있다. 국제사회의 정의는 ‘힘’이라는 것을 다시 절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있듯, 짓밟힌 엄마와 누나를 기억하며 두고두고 미국을 저주할 수많은 이라크 가족의 역사도 쓰여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가 순환한다면, 다음은 미국 차례다. 김일림 /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