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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시간의 강을 건너온 깊은 슬픔

그 얼굴은 슬프다. 작은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고수머리 동그란 얼굴에는 늘 그늘이 내려앉아 있다. 누나와 아버지의 힘겨운 일상은 고스란히 폭력으로 되돌아오고, 제제는 폭력을 피해 꿈의 세계로 숨어든다. 하지만 어른들은 다섯살짜리 꼬마 제제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슬프다. 여섯달째 실직상태인 아빠는 일곱이나 되는 식구를 건사하지 못해 늘 고개를 떨어뜨리고 살고 있다. 좋은 아빠였을 수도 있을 테지만 아빠를 위로해주는 제제의 노래도 자신의 처지를 놀리는 것으로 들을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있다. 영국인 방직공장에 다니는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에 늦은 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돌아오는 힘겨운 노동의 하루를 살고 있다. 제제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글로리아 누나의 얼굴도 어찌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슬프다. 슬픔은 칸 안에 깊게 내려앉고, 독자들의 마음으로 전이된다.

슬픈 하루를 즐거움으로 바꾸는 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슬픔의 만화다. 이희재의 다른 만화 <악동이> <아홉살 인생>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그렇듯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도 슬픔의 축에 서 있다. 즐거운 만화들, 백일몽, 판타지, 욕망의 틈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깊은 슬픔을 이야기한다. 제제는 슬픈 하루를 즐거움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꼬마다. 그 힘의 원천은 상상의 세계고, 따뜻한 마음이다.

♣ 제제는 가난과 슬픔, 죽음과 절망을 이야기한다. 제제에게 삶의 빛이었던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으로, 이 만화는 한국 만화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깊은 슬픔에 도달한다.

제제의 맑고 풍부한 상상은 결국 마음이 통하는 친구 뽀르뚜가에게 도달한다. 뽀르뚜가를 만날 때면 제제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제제의 마음이 치유되어갈 즈음 더 큰 상처가 제제를 찾아온다. 바로 뽀르뚜가의 죽음이다. 그동안 힘겹게 쌓아온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제제는 정신적 상처를 받고 자리에 누워버린다. 이희재는 그 힘들고 무거운 절망의 슬픔에 30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한다. 작품의 마지막. 공장의 지배인이 된 아빠는 제제에게 용서를 빌고,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약속하고, 여행도 가자고 하며, 새로운 큰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이야기한다. 꿈에서 라임오렌지나무를 만나 서서히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제제 앞에 펼쳐진 이 밝은 미래는 통상적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제는 냉혹하게, ‘아빠는 나를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우리 아빤 돌아가셨어. 망가라차바(기차를 뜻하는 말)한테 무참하게 치어 돌아가버렸어! 새로운 어떤 나무 따윈 소용이 없어. 난 이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잘라버렸어. 내게서 라임오렌지나무는 영원히 사라져버렸어’라고 마음속으로 울부짖는다.

제제는 가난과 슬픔, 죽음과 절망을 이야기한다. 제제에게 커다란 희망이고 삶의 빛이었던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으로, 이 만화는 한국 만화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깊은 슬픔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지니는 힘이다.

컬러로 새 옷을 입다

2000년대의 어린 독자들이 컬러로 채색된 <이문열의 삼국지>를 통해 이희재를 만났다면, 20년 전의 어린 독자들은 <악동이>를 통해, 15년 전의 어린 독자들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통해 이희재를 만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희재의 잃어버린 작품목록을 떠올릴 때까지만 해도 2000년대의 독자들보다 20년 전, 15년 전의 독자들이 더 행운아였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행운을 누린 독자라고 초판본 <악동이>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꺼내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은밀한 즐거움은 2003년, <악동이>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를 찾아오면서 모두의 것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도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새 옷을 입었다. 초판본의 2권이 두툼한 볼륨의 1권짜리 양장본이 되었고, 흑백이 컬러로 변했다. 컴퓨터를 오브제 삼아 입힌 컬러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보여준 수채컬러의 정서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계의 힘을 빌려 일관되게 통제된 색은 흑백이 주는 상상의 여지를 많이 앗아간다. 디지털의 이물감은 낯설고, 손의 냄새는 그립다.

처음 이 만화를 만나는 독자들은 제제, 루이스, 잔디라, 글로리아, 뽀르뚜가와 같은 낯선 이름과 마주칠 것이다. 그런데 오래 전 첫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과연 그 낯선 이름의 주인공들에게서 우리의 얼굴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만화독자들이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에서 새 희망을 읽어낼까. 이 만화는 너무 오랜 시간의 벽을 넘어온 게 아닐까. 아쉽다. 더 늦기 전에 한국 만화의 잃어버린 연대를 빨리 복기해내는 출판의 소중한 성과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c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