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켈빈(조지 클루니)은 행성 솔라리스의 탐사에 나선 친구 지바리안의 메시지를 받는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켈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자살한 연인 레아(나타샤 맥엘혼)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켈빈은 솔라리스로 향한다. 그러나 켈빈이 도착하니 지바리안은 이미 자살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다. 무슨 일이냐는 켈빈의 물음에, 고든과 스노는 직접 겪어보라고 말한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켈빈은 레아를 본다.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목소리로 켈빈에게 다가온다, ‘사랑해’라며. 솔라리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 가장 강렬한 기억을 복제한 ‘비지터’를 보내는 것이다.

<솔라리스>는 멜로영화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원작소설이 ‘인간 중심의 사고’를 뛰어넘으려 시도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72년작이 존재와 기억의 의미를 신중하게 탐구하는 것에 비해 스티븐 소더버그의 <솔라리스>는 사랑의 의미에 집착한다. 수수께끼를 푸는 스릴러 형식이나 과학적인 추론 같은 것에는 거의 기대지 않는다. 순수하게 한 남자의 사랑에만 집중한다. 스티븐 소더버그 특유의 현란한 카메라 워크도 거의 볼 수 없다.

미지의 존재가 기억을 읽어내고, 가장 큰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설정은 이제 익숙한 이야기다. <스피어> <이벤트 호라이즌> <콘택트>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 그려졌다. 그러나 소더버그의 <솔라리스> 전체를 흐르는 주제는 공포나 자학이 아니라, 딜런 토머스의 시구인 ‘죽음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이다. 켈빈은 사랑했던 여인이, 어쩌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켈빈은 레아를 사랑하고 있다. 솔라리스가 되살려낸 상처는, 기억은, 재생의 기회로 여겨진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솔라리스가 보낸 레아가 ‘가짜’라고 생각하여 부정했던 켈빈은 차츰 변화한다. 과연 무엇이 다른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사랑했던 레아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레아가 돌아온다면 그건 곧 현실이 아닐까?

<공각기동대>는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내가 나인 것은, 나의 기억 때문이다. 나의 육체가 소멸해도, 나의 기억을 다른 육체에 옮긴다면 정체성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아는 어떨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레아는 레아의 기억이 아니라, 켈빈의 기억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켈빈이 기억하고 있는 것만을 레아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레아는, 레아가 아닌 것일까? 레아는 켈빈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다. 레아의 육체와 목소리, 켈빈이 기억하는 그녀의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켈빈이 사랑했던 레아인 것은 아닐까?

>♣ 다른 대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비지터`라고 불리는 미지의 존재인 레아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스티븐 소더버그가 만든 <솔라리스>의 레아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레아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당신의 기억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라고, 레아 스스로 의심한다. 기억을 복제하여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처럼,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지 않는다.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의 복제인간들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것과는 다르다. 레아는 자신의 기억이 불완전하고, 켈빈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런 자각은 소더버그판 <솔라리스>의 주제와 묘하게도 부합한다. 소더버그가 말하는 것은 진리의 탐구나 철학적인 회의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결국 상대의 시선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지적 모놀로그가 가득 담긴 소설과 달리 타르코프스키는 플래시백의 비중을 다용한 감정적 플롯에 둠으로써 원작자인 렘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말로 미루어본다면 이번 <솔라리스>는 렘에게 더욱 불쾌한 영화일 것이다.

<타이타닉>의 절반을 멜로영화로 채웠던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을 맡은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소더버그의 <솔라리스>는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사랑의 이야기로 방향을 잡았다. 방향에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솔라리스>는 켈빈의 기억에서 펼쳐지는 추억의 순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조지 클루니의 표적>과 <트래픽>처럼 도시의 시끌벅적한 소동과 그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들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도시 안에서 켈빈과 레아가 만나고, 그 사랑이 깊어지면서도 조금씩 벌어지고 마침내 파국으로 향하는 순간을 예리하게 함축적으로 잡아내는 소더버그의 연출, 촬영, 편집은 여전히 탁월하다. 반면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고뇌는 좀 지루하다. 너무 뻔한 길을, 너무 심각하고 느리게 걸어간다. 더 진지해지거나 더 로맨틱하게 갔다면 어느 쪽이건 더 즐겁지 않았을까.

칸에서 할리우드로

스티븐 소더버그는 천국과 지옥을 순식간에 왕복한 인물이다. 데뷔작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지만 <카프카> <리틀 킹> 등 후속작들이 연속으로 실패하면서 순식간에 잊혀졌다. 10년 만의 재기작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 조지 클루니와 만난 <조지 클루니의 표적>. 전작들과 달리 가볍게 코미디 터치를 가미한 <조지 클루니의 표적>은 영화의 장르적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남녀는 과거의 스크루볼코미디를 보는 기분이고, 조지 클루니와 제니퍼 로페즈라는 다소 ‘느끼한’ 배우들을 산뜻하게 잡아낸 연출은 모범적이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잘 다듬어져 나온 장르영화의 재현이라고나 할까.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할리우드와의 절충점을 찾은 스티븐 소더버그는 거침없이 달려간다. B급영화의 감수성을 간직한 <라이미>로 예행연습을 마친 소더버그는 2000년 들어 <트래픽>과 <에린 브로코비치>를 한꺼번에 내놓는다. 결과는?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에 두편을 동시에 올려놓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트래픽>은 감독상, 편집상 등을 수상했고 <에린 브로코비치>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흥행에서도 두 작품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 1년 뒤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줄리아 로버츠 등 스타를 대거 기용하여 만든 <오션스 일레븐>은 전세계에서 4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확실하게 입지를 굳힌다.

재기한 뒤,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스티븐 소더버그이지만 지난해에는 18일 동안 디지털카메라와 필름을 혼용한 코미디영화 <풀 프론탈>을 연출하고 <웰컴 투 콜린우드>와 <파 프롬 헤븐> 등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영화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