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2월, <창작과 비평> 봄호를 통해 내가 시인으로 데뷔(라는 말은 여전히 쑥스럽고 낯설지만)했을 때 창비 출판사 편집장은 이시영(시인)이었다. 그는 당시 첫 시집 <만월> 한권을 냈을 뿐이지만 이미 가장 빼어난 한국 서정시인의 한명으로 손꼽히는데다 안경테 속 눈동자가 이따금식 번뜩이는 것말고는 외모가 대체로 허하게 구부정하고 표정은 모더니즘이 가끔 묻어나기는 하되 뭔가 ‘유구한’ 것이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나는 그가 편집장을 맡은 지 한 10년은 족히 됐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신참 편집장이었다. ‘창비’와 ‘문지’는 곧 강제 폐간되고 군사독재보다 더 가혹한 가난이 특히 창비쪽 문인들을 덮쳤다. 이때 ‘창비 이시영’이 없었다면 빈사자가 발생했을지 모르고, 다른 사람이 이시영 역을 맡았다면 아직도 생존해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창고 건물을 빌려 연명하던 창비 출판사 재정을 끈질기게 축내며, 시도때도없이, 혹은 아침부터 찾아와 죽치는 문인과 재야지식인들에게 밥과 술을 사고 울분을 달래주었다. 한 6∼7년이 지나 기력이 쇠해지자 마시다 졸다 다시 깨서 마시고 그런 식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왜냐면 그가 없으면 글쟁이들은 자비로 먹을 수밖에 없고, 그건 그가 제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잠들기 전이든 잠이 깬 뒤든 그가 부르는 <해운대 엘레지>는 그의 시 못지않게 절창이었다. 이영희(한양대 교수), 조태일(작고, 그는 주로 술을 사는 편이었지만) 같은 어른에서부터, (아마도) 나희덕(시인) 정도 연치의 ‘창비쪽’(이런 말이 아직도 허용된다면) 후배들에 이르기까지 80년대는 이시영이 있으므로 무척 따스하고 행복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술상무 역할’이 이토록 감동적인 문학성을 뿜어냈으므로 그 빛에 가린 면이 없지 않지만 그는 온갖 젊고 참신한 감수성이 난무하는 지금 시단에서도 여전히 가장 빼어난 서정시인 중 하나고 산문 분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희귀한 미문 능력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나눠 먹기’ 혹은 요샛말로 ‘문단권력’ 혐의에 미리 질겁한 주변의 배려(?)로 상복은 없었고 딱 한번 받은 정지용문학상은 상금 전무였으므로 하객접대용 술값 300만원만 축냈다(요즘 세상에, 상금 없는 상은 일종의 테러다). 그가 재직 23년 만에 퇴임했다. 조촐한, 아니 조촐하기로 작정한 퇴임 기념 술자리에는 오래된 창비 직원 몇몇과 염무웅, 정희성, 김사인 등 창비 관계자만 참석했고, 나는 딴 일로 만난 성석제(소설가)와 고운기(시인)을 주책없이 보탰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