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을 오가는 수타 살인마
도쿄 한복판인 신주쿠의 가부키초에서 잔인하게 뒤틀린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온몸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뽑아서 비틀어버린 듯하고, 원래는 160cm 정도의 키가 사망 당시엔 210cm로 늘어나 있었다. 범인에 대한 단서라고는 “鬼神의 피, 怨恨, 至福, 이러한 것들의 어마어마한 말을 나는 心으로부터 이해했다”는 한자와 한글이 뒤섞인 피의 문장. 사건을 맡게 된 경시청의 이노세 경부보는 이 사건이 최근 요코하마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의 연속이라 여기고 재일한국인을 용의선상에 올린다. 그러나 범행 현장에 서울에서 온 젊은 형사 강청도가 나타나고, 그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서울과 부산에서 이미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현장에는 반대로 일본어로 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살인마, 과연 그의 정체는 누구인가?
대립에 대한 정면돌파
<푸른 길>(학산문화사 펴냄)은 일본의 스토리 작가 에도가와 게이지와 한국의 만화가 권가야가 손을 잡은 한·일 합작 프로젝트의 작품이다. 이미 몇년 전 양경일과 히라이 가즈마사가 <좀비 헌터>를 통해 비슷한 형태의 협업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일본 출판사가 주도해 일본 독자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번에는 한·일 양국의 잡지에 동시에 연재되면서 양국 독자들에게 함께 평가를 받는다는 중대한 변화가 있다. 물론 그 작품이 막연한 판타지와 생활의 서정 정도를 담은 작품이라면, <슬램덩크>가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연재되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가야-에도가와 콤비가 이 기묘한 살인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한국과 일본의 뿌리깊은 대립의 상황을 정면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행 현장의 문구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만행을 참지 못해 조선에 귀화한 항왜(抗倭)의 하나인 에미리(哀美理)의 병법서에 적혀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조선군의 편에 서서 왜군 수천명을 죽이고 잔혹하게 눈코귀를 베어 꼬챙이에 꿴 인물이다. 한반도와 일본을 넘나든 이 오랜 잔혹의 신화는 20세기로 이어져, 에미리의 후예인 홍두용과 그 병법서를 찾아온 일본인 휴가 요시노리, 그리고 홍두용의 제자인 주인공 강청도에까지 공포의 손길을 드리운다. 게다가 박정희의 암살사건, 일본 북부에 침투해온 구소련의 조직과 같은 냉전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드리워져 사건의 깊이와 굽이는 알 수 없는 지경으로 들어간다.
사실적 필체의 미스터리스릴러
권가야는 극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사실적 필체를 더욱 심화시켜, 거의 사진적인 사실형의 인물들로 작품을 이끌어간다. 분명히 대단히 차가운 인상을 자아내는 이러한 표현은 한편으로는 작품의 현실성을 드높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살인을 둘러싼 기괴한 이미지의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또한 그는 대단히 다채로운 인상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그 각각을 서로 다른 명암의 기법으로 묘사하는 복잡한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르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화려한 기교가 넘친다. 기묘한 연기의 무늬 등을 이용한 초현실적인 감성의 표현도 좋고, 중요한 순간에 노출 과다의 사진처럼 하얗게 명암을 날리는 기법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너무 잦은 표현방법의 변화는 인물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고, 조금 정밀도가 떨어지는 표현에서 더 큰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 아주 간간이 나오는 개그 묘사나 어린 시절의 동화적 표현에서 분명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에도가와는 일본의 이노세와 한국의 강청도라는 두명의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이들의 협업을 통해 사건을 풀어가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나라에 대해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곧 친숙해지며 공동의 전선을 만들어간다. 물론 버디만화로서 두 형사가 티격태격 위태하게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로 뭉치게 되는 상황이 좀더 캐릭터의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이 약간은 포함되어 있다고도 보인다. 작품 초반에 주먹부터 앞서는 현장파인 이노세가 서울에서 와서 제멋대로 사건을 수사하는 젊은 엘리트 강청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하지만 이노세는 곧 그를 보호해주는 조연의 역할로 돌아선다. 두 사람은 모두 자국의 보수적인 경찰, 혹은 그 밑바닥의 커다란 편견 때문에 주류로부터 배척당하는 입장에서 느끼는 공감대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문제를 풀 사람은 에미리의 병법을 이어받은 ‘푸른 길’ 강청도로, 만화는 그에게로 중심을 모으고 있다.
엽기적인 시체를 정밀하게 보여주는 미스터리스릴러는 1990년대 일본 만화의 주요한 경향이지만, 이는 <엔젤 딕>의 이현세 등 한국 극화에도 결코 무시 못할 강한 전통으로 남아 있다. <지뢰진> <미스터리 극장 에지> <다중인격 탐정 사이코> 등이 보여주는 잔혹의 묘사는 대단히 강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한국적 스릴러의 전통 때문인지 권가야의 <푸른 길>의 이미지는 대단히 칙칙하다. 홍콩이나 동남아시아의 액션물이나 공포물이 보여주는 끈적거리는 불쾌감이 한국 극화의 또 다른 성격으로 존재하고 있는 듯도 하다. 더불어 서울에서 가장 흉포한 조직 ‘질풍’을 혼자 힘으로 쓸어버렸다는 강청도의 ‘푸른 길’ 전설은 액션만화의 한국적 경향성을 보여주는 요소로도 보인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