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베트남 호치민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어린이의 공포’ 그림을 모 잡지에서 보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아이의 눈빛을 바라보면, 1964년 한국군을 파병한 우리 행위가 얼마나 끔찍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는가를 전율케 한다. “저는 결코 망각의 죽을 먹지 않을 거예요.” 베트남 작가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실천문학사 펴냄)의 주인공이 다짐한 말이다. 우리가 저지른 추악한 모멸을 그들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내 아이가 내 가족이 피를 흘리는 전쟁의 ‘현실’에 또다시 직면해 있다. 미국은 지난 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전범국가의 잔인한 전횡을 여전히 휘두르고 있다. 우리는 <Korea War ll>를 두려워하며, 미국을 지지해야 하는 무기력한 정부에 내 아이와 내 가족의 목숨을 맡겨놓고 있다.
요르단 암만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온몸에 엄습하는 무력감, 시의 무력감, 사랑의 무력감에 그저 먹먹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이라크로 떠난다는 박노해 시인의 편지였다. 그는 3월17일 새벽 3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선포하자 곧바로 서울을 떠나 이라크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다. “나는 이라크전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못난 내 나라의 현실이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라크인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의 진정한 마음은 이렇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나누는 것임을 조용히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시인의 몸과 사랑은 이라크 바그다드로 향했다.
그가 보내온 편지에는 이라크인들의 분노와 눈물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암만에서 바그다드로 향하는 나이어린 피르하신과 나눈 대화는 고통스럽고 아프다. “나는 전쟁의 자식이다. 내가 태어나던 해 이란과 전쟁이 있었고, 12살 때 걸프전이 있었다. 나는 사이렌 소리를 음악으로 들었고 수시로 떨어지는 미사일 틈에서 자랐다. 이제 외국에서 자리잡고 살 만하니 또 전쟁이다. 전쟁이 내 인생이지만, 나는 부당한 침공에 굴복할 수 없다. 나는 이 전쟁을 뚫고 나가 살고 싶은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말 것이다.”
3월25일, 가수 신해철을 필두로 한 대중음악인연대 70여명이 파병반대 반전 기자회견을 가졌다. 해외체류 중인 서태지는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신해철, 윤도현, 강산에, 안치환 등이 중심이 되어 반전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다. 반가운 소식들이다. 한편 영화계에선 특별한 소식들이 들리지 않는다. 영화계 단체 명의의 성명과 ‘파병반대 영화인 선언’ 정도의 소식만이 들린다. 참여 인원도 소소하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톱스타 배우들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방은진만이 청와대 앞에서 외로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영화배우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뭐 별난 것이 있겠냐마는 그들을 추앙하는 대중의 기대는 분명 다르다. 올해 초 베를린영화제에서 에드워드 노튼, 더스틴 호프먼, 조지 클루니 등이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그 어떤 반전 메시지보다 대중에게 강렬하게 들린다.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 안팎에서 들려오는 스타들의 반전평화 목소리는 할리우드의 보수성을 넘어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장편다큐멘터리 수상자인 마이클 무어가 청중을 향해 “부시 정신차리시오” 하고 외치는 장면은 감동의 작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지난 26일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자든 수상자든 전쟁은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두 사람의 멘트가 있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다. 며칠 뒤 연예계 뒷얘기랍시고 한 일간지를 장식한 화려한 기사는 ‘노팬티 논란 인터넷 후끈’이었다. 엄정화의 엉덩이가 터질 듯한 사진을 전면에 싣고, 친절하게 주까지 달아놓았다. “노팬티 논란을 일으킨 엄정화의 섹시한 드레스가 시상식장에 참석했던 관객과 TV로 지켜본 시청자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젠장! 이쯤 되면 요즘 속된 말로 “막 나가자는 거죠?”다.
그래도 나는 영화배우 중에 방은진이 있어서 자랑스럽다. 그가 비록 대중의 우상은 아닐지언정 존경받아 마땅한 뛰어난 연기자다. 지금은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으니, 얼마 뒤에는 감독 겸 연기자가 될 거다. 한국의 조디 포스터가 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배우들이 꿈과 희망을 키워가는 젊은 세대에게 그 사랑을 돌려주는 감동의 메시지를 듣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방은진을 홀로 청와대 앞에 세워두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 기대하는 나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방은진에게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방은진 파이팅!”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