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맑은 사랑이야기
“오늘도 그녀에게 말을 걸었어요.”
여기 이 남자 베니그노. 4년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여자의 발을 씻기고, 머리를 깎아주고, 옷을 갈아입혀준다. 십수년동안 병수발을 들던 어머니가 떠나고, 자신의 집 창문밖으로 보이던 무용학원의 발레리나 알리샤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있다. 그 깊은 외로움 속에서 약간 모자란 듯 보이지만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을 들려줄 것이다, 알리샤에게, 그리고 모든 관객에게.
발레리나와 투우사였던 식물인간, 두 여성의 곁을 두명의 남자가 지킨다. 4명은 끝내 '헤어지지만'‥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전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이 세상의 어머니들의 모성애에 헌사를 바쳤다. 80년대 그가 알록달록한 색상과 양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분방한 묘사, 기괴한 유머로 자신의 작품을 이어나가던 ‘악동’이었다면, <내 어머니의…>에서부터 그는 인간의 마음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거장이 된 느낌이다. 멜로이자, 비극이자, 코믹이자, 서스펜스이자, 초현실적 분위기까지 실어낸 <그녀에게>는 그 증거다.
베니그노와 알리샤 옆에는 마르코와 리디아가 있다. 발레리나였던 알리샤와 달리 리디아는 가장 인기있는 스페인의 여성투우사였다. 여행 저널리스트였던 마르코는 지독한 연애 끝에 동료투우사와 헤어진 리디아를 취재하다가 사랑에 빠지지만, 리디아는 시합도중 소에 부딪쳐 혼수상태에 빠지고 만다. 영화의 시작 부분 독일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 공연에서 눈물을 흘리던 마르코를 지켜봤던 베니그노는 이내 그와 친구가 된다. 식물인간이 되어 있는 연인들을 곁에 둔 두 남자는 함께 볕을 쬐고 이야기를 나누며 상처를 발견하고 서로 치유한다.
인간의 마음 바닥까지 만져‥멜로이면서 비극코믹, 서스펜스이자 초현실‥경이로운 예술이 왔다
연인들은 엇갈린다. 베니그노가 사랑하는 이 곁에 당당하게 머물수 있는 것은 알리샤가 식물인간이 된 이후이고, 마르코는 연인이 어쩌면 자신을 떠나려 했을 지 모른다는 사실을 리디아가 식물인간이 된 뒤 다른 남자의 입을 통해 듣는다.
마르코가 떠난뒤, 알리샤의 곁에 남아있던 베니그노는 <애인이 줄었어요>라는 흑백무성영화를 보고 돌아온 뒤 ‘엄청난 짓’을 저지른 죄로 갇힌다. 알모도바르는 마치 마술처럼 윤리적 잣대론 돌을 던질 일에, 연민을 넘어 공감하게 만든다. 세상의 통념을 넘어선 ‘완전한 헌신’이 있음을 베니그노는 보여준다.
영화 앞뒤에 삽입된 피나 바우쉬의 공연, 흑백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 브라질의 키에타노 벨로소의 공연 등이 포함된 <그녀에게>를 보는 것은 경이로운 예술을 경험하는 2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알모도바르가 직접 공들여 만든 흑백무성영화는 이전 그의 도발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 네 주인공 모두 뛰어나지만 짜리몽땅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의 베니그노를 소화한 하비에르 카마라와 뒷모습마저 쓸쓸한 마르코역의 다리오 그란디네띠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이 작품으로 지난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알모도바르는 이 상을 “국제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쳤다. 야만적인 행위 앞에서 헌신과 사랑을 바치는 그들은, 대상은 다르지만, 바로 베니그노일지 모른다. 18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