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 출판가의 베스트셀러로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현대의 마키아벨리라 일컬어지는 로버트 그린이 쓴 것으로 무력이나 완력이 그 이상의 소기를 이룰 수 없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물리적 작용이 아닌 소통의 한 형태로서, 9가지로 유형을 정한 뒤 그 증상과 특징들을 기술한 책이라는데 튼실한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내 관심사안의 사람들을 그 범주에 넣고 재단(?)해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여 지금도 무료할 때마다 시시덕거리며 간간이 읽는 중이다. 어느 한날, 열대여섯명이 판을 벌인 술자리, 그 술자리가 무르익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시종일관 ‘대체 이 사람은 어느 유형에 속할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킨 인물이 있었는데, 이름하야 영화제작사 싸이더스 대표 차승재였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호칭이야 형, 동생이지만 서로의 안부를 챙긴다거나 인신을 염려해주는 그런 애틋한 관계도 아니고 또 내가 달리 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그날의 필이 그에게 꽂힌 것은 온전히 질나쁜 싸이더스 제작부의 나에 대한 만행 때문이었다. 사연인즉 내가 싸이더스의 한 프로젝트를 맡아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부터 본의 아니게 그 회사를 빈번하게 드나들게 되었고 또 그러다보니 어찌어찌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어 친분을 쌓은 지 근 일년, 나는 떼로 술마시던 바로 그날, 일년 세월의 하찮음을 그들로부터 배웠다. 내가 싸이더스에 들르면 계약서상에 명기된 잔금받을 날이 아직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중 PD방에 들러 습관처럼 하는 일이 고함치듯 “형 금복주 어딨어?(나는 차 대표가 없을 때 그를 그렇게 부른다) 한창 잘 나가는 사람 불러다 일 시켰으면 돈을 줘야지 말이야, 빨리 돈 받아줘!”라는 말로 기선을 잡는 일이다. 그 소리를 신호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이고, 안 보이는 사람들 전화로 연락해 술판을 벌이게 되는데, 그날도 그렇게 자리를 잡다보니 십여명이 훨씬 넘었다. 사실 지난해 하반기 때부터 싸이더스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음을 알았지만, 지금껏 글 작업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게 지원을 해줘 그런 대로 회사의 여력이 있는 줄로만 알았고 또 그것을 싸이더스의 저력이라 여겼다. 그런데 영화시장 위기 운운하며 영화사마다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소문이 아니고 현실임을 알았을 때, 또 얼마 전 <씨네21> 인터뷰에서 공공연히 차 대표 자신의 입으로 힘듦을 고백했을 때, 저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그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가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저 사람 어쩌려고 저러지?’ 하는 내 기우는 기우였던 것 같고 그 자신 또한 그런 기우에 구애받지 않을,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믿는 구석이란 다름 아닌 술자리에서 농담으로라도 자신의 대표를 험담하고 비하하는 객 작가를 통돌림시키는 직원들이었던 것 같은 심증이 간다. 싸이더스를, 또는 차 대표를 조금이라도 씹을라치면 강제로 내 입을 찢어 술을 붓고, 주먹만한 크기의 감귤을 입에 넣으며 “70명이 넘는 직원들 먹여살리는 우리 대표를…”, “한입 덜어도 시원찮을 판에 직원 중 누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지금 영화판 춥다. 나가더라도 날씨 따뜻할 때 나가’ 하며 잡는 승재 형을…”, “나가라고만 안 하면 1년 월급 한푼 안 받을 용의가 있는 우리에게 감히…” 하는 신파까지는 봐주겠는데 “나도 직원이면 그럴 수 있어. 근데 나는 직원이 아니잖아…” 하는 순간에 “야 제작부 막내! 김 작가님 우리 회사 취직시키게 이력서 사와”라는 희롱과 “작가가 돈보다는 글에 전념해야지 말이야…”라는 훈계와 “우리 앞으로 밥 안 먹겠으니 차라리 돈 대신 식권으로 가져가라”며 우르르 일어서 주머니에 있는 식권을 내 앞에 내놓는 조롱 앞에서 나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렇듯 왁자한 분위기와 소란 속에서 눈치빠른 내 눈에 감지된 그들이 처한 상황과 진실이란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오너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신뢰, 자신들이 뿌리내릴 회사에 대한 믿음과 자긍심 등…. 설령 그것이 한껏 물오른 취흥에 고무된 괴스러운 덕담이요 취중객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주정이요 배우고 닮고 싶은 관계였다. 어떤 기술로 차승재와 그들은 서로를 유혹했으며, 서로에게 그렇게들 깊이 매혹당했을까! 그렇게 엮인 그들이 혼연되어 만들어낼 앞으로의 영화는 과연 어떤 꽃, 어떤 향기로 피워져 만개할지, 기대 또 기대된다.
사람이 머물다간 자리, 남는 것은 그 사람의 향기뿐이라던데, 나 스스로는 어떨까? 글쎄다…. 자신없음으로 일단 급한 대로 향수라도 하나 좋은 걸로 준비해놓는 수밖에…. 김해곤/ <파이란> <블루>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