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은, 뭐랄까, 나를 늘 ‘애정=걱정’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나는 그런 그를 늘 빤히 쳐다보고, 너무 큰, 큰 만큼 여린 그의 눈 안에 들어 있는, 그러니까 그의 걱정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내 모습은 어김없이, 과연, 안쓰럽지만, 그러므로, 나같이 씩씩한(?, 누구는 내가 사막에 홀로 떨어져도 살아나올 놈이라 했다) 사람까지 품어주는 그가 당연히 더 안쓰럽고, 그가 <한국일보> 편집위원(현재는 논설위원)에 출근하고 월급(실업자들에게 ‘월급’이란 단어는 난해한 신화 자체다)까지 받게 되었다는 소식은 내게 그해 가장 반가운 톱 텐 뉴스 중 하나였다.
그가 나를 ‘애정-걱정’하는 대목은 내가 ‘막차 탄 좌파’처럼 보인다는 점과 연관이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생계를 빙자, 너무 많은 글을 쓰고 날린다는 점에 있다(그렇게, 과연, 그는, ‘좌파’ 문학평론가 김철의 표3글처럼, “어떤 ‘좌파들’보다 좌파적이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다). 기자 주제에…(기자야말로 글을 너무 많이 쓰는 직업 아니겠는가?). 그런 농담보다 진담에 가까운 항변을 속으로 늘어놓으면서도 내가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은 그의 글이, 기사일 때에도 상당히 꽤 까다로운 미문을 지향하기 때문이었다(김훈의 글이 격정을 예각으로, 혹은 낭떠러지로 깎아지른다면, 고종석의 글은 정치적 시사를 논할 때조차 안정의 형식미를 지향하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한다).
그런 그가 <한국일보>에 ‘오늘’을 연재하는 터라 나는 걱정을 넘어 그가 불쌍해지고, 또 그게 고소했다. 오냐, 잘됐다, 너도 한번 글 지옥을 겪어봐라…. 처음 한두번은 과연(이란 말이 왜 자꾸 튀어나오지?) 그가 휘청대는 듯했다. 그렇지, 그렇지…. 하지만 일주일을 못 넘기고 나는 그의 글에 매료되었다. 스스로 ‘부고 담당 기자’를, 다소 자조적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의 ‘오늘’(죽은 사람)을 읽으면서 나는 그 옛날 성명서- 장례식을 치를 때 느꼈던 문학적 낭패감 혹은 절망감(흥분된 슬픔 혹은 분노가 오히려 감동의 질을 떨어뜨리고, 요란한 조시-조사가 죽은 자를 다시 한번 죽이는)의 기억을 크게 벗으면서, ‘죽음의 미학’이란 말이 실감났다. 그가 정리한 죽은 자 생애는 ‘세속성의 고전미’에 달한다고 할 만하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그러므로 상투성이 용인되고 당연시되는 ‘신문’의, 더군다나 뉴스도 아니고 ‘오늘의 역사’류를 일상을 심화하는 죽음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그의 필력과 혜안이 부럽다. 김정환/ 시인 · 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