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과 작품 사이
최근 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모 대학 겸임교수도 하고 있는 그분은 이번에 그 대학 졸업생 6명을 자신의 회사로 데려왔다고 했다.
“아, 그럼 졸업생 중 총몇명이 취업한 건가요?” “이게 다라고 하던대요.” “….”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취업난도 더 심각해졌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좀 이름이 있다는 대학이 이 정도면 다른 곳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잠재된 문제 중 하나는 수요공급의 불균형이다. 전국에 개설된 만화애니메이션 학과가 114개(2002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분석)라는데, 지난해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에 등록된 회사가 100개다. 한마디로 엄청난 공급과잉인 것이다. 정부와 학계, 업계가 이 문제를 심각히 고민하지 않으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대학 졸업생이 쏟아져나오는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독립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고나 다른 일을 통해 생활비를 벌며 틈틈이 자기 작품을 만든다. 결코 화려한 직업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행운아도 있게 마련이다. 이고르 코발료프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 키예프 출신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구에 의해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선 인물이다. 러시아영화와 애니메이션계에서 당대 최고로 꼽히는 타르코프스키와 유리 놀슈타인 밑에서 문학과 철학과 영화를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행운아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의 몇몇 단편들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클라스키&추포’의 공동대표인 가버 추포의 눈에 띄었고 그의 마음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그의 천재성을 간파한 추포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자신의 회사에 와서 얼마간 상업적 프로젝트에 참가해주면 일정 기간을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가을 캐나다 오타와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코발료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떤 조건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다만 “매우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의 작품을 2000년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본 적이 있다. <난센, 날다>(Flying Nansen)라는 작품이었다. 캐릭터의 독특한 선이 눈에 띄었고 특히 중간색을 단단해 보이는 느낌이 들도록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대중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개성이 뚜렷한 작품이었다.
현재 JEI스스로방송에서 방송 중인 <아기친구 러그레츠>가 그의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강점이었다. 영국의 애니메이션 평론가 제인 필링은 가버 추포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그의 스타일은 할리우드 TV제작사에서 요구하는 것과 모든 것이 달랐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재능을 믿었다. 그가 쉽게 그의 기술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옳았다.”
기저귀를 찬 아기들이 벌이는 모험을 아기들의 입장에서 통쾌하게 그려내는 <아기친구 러그레츠>에서 <난센, 날다>의 이미지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 작품 역시 코발료프 특유의 캐릭터와 색감과 움직임이 배어 있다. 박수동의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자유로운 선 속에 숨겨진 인생에 대한 관조랄까. 필요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코발료프의 재주와 그런 재주를 품에 안은 추포의 넉넉함. 코발료프와 추포라는 찰떡궁합의 코리아 버전은 과연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