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재야! 나 이번주 일요일날 마라톤 하러 서울 간다.”
“웬 마라톤? 야 임마! 너 같은 배불뚝이가 어떻게 마라톤을 해.”
“이눔의 짜슥이 이 헹님을 무시하네. 국제마라톤대회에 정식으로 참가하는 거야, 임마!”
“그래? 아무래도 구라치는 것 같은데, 어쨌든 서울에 오니까 끝나고 소주나 한잔 하자.”
지방에서 변호사 노릇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걸려온 느닷없는 전화 통화다. 올해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고, 나이는 마흔줄로 접어들었다. 변호사 친구는 작달막한 키에 대머리이고, 85kg이 넘는 비대한 몸집이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구질구질한 40대 아저씨다. 특급호텔 커피숍에서 차를 주문하고, 서빙하는 아가씨를 옆에 앉히려고 떼(?)쓰는 걸 보면 시골 다방에서나 죽쳐야 어울리는 지방유지다. 이런 친구가 마라톤을 뛰다니! 그것도 국제마라톤대회에 정식으로 참가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에라! 이 미친놈아. 누구한테 사기치려고 작당하는 거야?
지난 3월16일 오전 8시, 2003 동아국제마라톤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황영조, 이봉주의 대를 잇는 지영준 선수가 100m를 앞두고 추월을 당해 아깝게 2위를 했다. 8300여명이 참가했고, 이중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변호사 친구도 42.195km 풀코스를 완주했다. 기록은 4시간13분. 이 대회에 공식적으로 참가하기 위해서는 4시간30분 안에 완주한 공인된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내 친구가 사기꾼이 아니라 우리의 영웅이라는 것도! 그는 앞으로 보스턴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보스턴대회의 참가자격 기록은 3시간30분이란다. 나는 친구와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며 40대 인생의 꿈과 그의 마라톤 철학을 진지하게 나누었다. 그의 꿈이 보스턴대회에서 실현될 것을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친구가 자랑스럽다. 나도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술 좀 작작 마시고, 달리자!
17일 12시, 남산 동보성에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총회가 열렸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유인택 회장이 물러나고, 한맥영화사 김형준 대표가 제5기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만, 역시나 요즈음 같은 상황에서는 영화 해먹기가 더럽게 힘들다는 넋두리가 대부분이었다. 몇년을 고생해서 일구어온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줄줄이 유산되고 있다. 투자를 받기는커녕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진행하던 작품도 버려지고 있다. 너는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자 주의다. 영화를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시나리오의 90%가 코미디다. 이놈의 영화판이 코미디 왕국이 될지 코미디 망국이 될지 두고볼 일이다. 제작자들 스스로 쪽팔리고 개탄스럽다. 제작가협회가 단결하여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지만, 조직의 단결력이나 힘이 있기는커녕 동네 조기축구회만도 못하다. 그래도 우리가 새로운 희망을 갖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단결하여 일어서자고 다짐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도 변화하자. 김형준 회장을 중심으로 제작가협회의 조직과 위신을 세워가자고 힘차게 박수를 쳤다.
친구의 마라톤 철학이 나에게 일깨워준 것이 있다. 마라톤은 처음 시작해서 마지막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까지 항상 처음과 같다고 했다. 그동안 5km를 달려왔든, 20km, 30km를 달려왔든 끝까지 완주해야 하는 부담은 처음과 똑같다는 말이다. 설령 100m를 앞두고서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목표를 눈앞에 두고 오바이트를 하면서 쓰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한국영화의 마라톤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의 요즈음 체력은 10분만 달려도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터질 듯 숨이 막혀와 곧바로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만 영화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목표지점까지 몇 km가 남았는지 알 길이 없다. 처음 시작한 것처럼 달리고 또 달려갈 뿐이다. 언젠가는 우렁찬 함성과 박수소리를 들으며 골인할 날이 오겠지! 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