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여! 홀로 서소서
일단 독자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 한마디. 지난주 ‘슈미트에 대하여(<어바웃 슈미트>)’에 대하여 네 페이지나 읽힌 것도 모자라 이번주에 또 읽으란 말이냐며 독자들이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는 편집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냥 쓰기로 했다. 정 괴로우시면 그냥 넘기시기를(넘기기 전에 한번만 더 생각하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은 있다).
지난주 같은 날 본 한편의 칼럼과 한편의 영화는 우연히도 둘 다 ‘은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하나는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실린 ‘자장면과 삼판주’였고, 다른 하나는 아시다시피 <어바웃 슈미트>였다. 칼럼을 먼저 읽었다. 글도, 이 글이 인용한 건축가 김원 선생의 글도, 그리고 김원 선생의 글에 등장한 은퇴한 노교수도 인상적이었다. 말이 쉽지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가지고 있던 것들- 외모, 자리, 능력 등등- 을 하나둘씩 잃어가는 노년에,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도 서서히 잊혀져가는 시기에 ‘명예’나 ‘영향력’을 스스로 놓아버린다는 건 존재적 결단을 요구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나이들면 미련없이 버리고 표표히 이 욕망투성이 속세를 떠나리라.
그러나 <어바웃 슈미트>를 보면서 안 해도 될 결심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결심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나나 슈미트같이 ‘아무나’에 속하는 사람들은 은퇴를 하면 불러주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가능성이 100%에 가깝기 때문이다. 순전히 나를 찾아오는 번잡함을 덜어주려는 배려 차원에서 옥체 이끌고 직접 왕림해드려도 ‘왜 안 나가고 눈앞에서 거치적거리냐’는 눈길만 쏟아지는 형국에 “어떤 제안과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가겠어”라고 결심하는 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누가 거절할 제안이라도, 흔들릴 기회라도 제공을 해야 폼을 잡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닌가. 젠장, ‘걱정도 팔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봤던 친구에게 짧았던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니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너한테, 젊어서도 질질 싸던 너한테 늙어서 뭔가를 맡기겠니. 걱정하지 마.” 내 어깨를 꼬옥 잡고 이야기했다. 참으로 좋은 친구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순전히 세상에서 따당할 자신을 걱정하는 차원에서 서로를 독려했다. “너, 꼭 오래 살아야 해.”
지난주 <씨네21>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어바웃 슈미트>는 노인 성장드라마로 보인다. 안 그래도 고단한 인생, 환갑 넘은 나이까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슬프지만 말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갈고 닦고 조여야(웬 교도소 표어냐) 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나 지식인도 아닌데 말이다.
<어바웃 슈미트>를 보면 노인의 성장기는 젊은이들의 성장기보다 가혹해 보인다. 거절하는 입장에서 거절당하는 입장으로의 급전직하! 젊은이들도 거절당하고 실패하지만 그들에게는 “우린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잖아”라고 말할 자격이라도 있지 않은가. 슈미트가 당하는 거절의 정수는 그의 딸로부터 날아온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뒤 집에 좀더 머물며 자신을 돌봐달라는 슈미트에게 딸은 딱 한마디 한다. “아버지도 이제 혼자 사는 법을 배우셔야지요.” 자신의 돈으로 신혼여행까지- 게다가 자신이 기쓰고 반대한 남자와 결혼하면서- 가는 주제에 당당하게 거절하는 딸에게 그는 배신감을 느끼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은퇴하고 홀로 집에 남은 그가 배워야 할 삶의 방식인걸.
특히나 주로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하게 평생을 살아온 남성들은 슈미트처럼 극심한 노년의 ‘성장통’을 겪는 것 같다. 남성에 비해 관계지향적인 여성들에게는 친구며 동네 아줌마며 일찍이 이권과는 무관하게 맺어놓은 관계의 끈이 연금이나 보험처럼 기능하는 편이지만 나 하나 잘났다고 믿고 살아온 남성들에게 평범한 은퇴 뒤의 평범한 삶이란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버지처럼 매일 아침 엄마가 자는 사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따님을 깨우고 “밥 먹을래 빵 먹을래?”, “빵”, “프렌치 토스트 해줄까, 그냥 토스트 해줄까, 아니면 팬케이크 구워줄까?” 부단히 노력하며 치열하게 살아남거나 슈미트처럼 죽기 전에 한번 가보는 것조차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지구 반대편에 친구를 만들거나 두 가지다.
받는 이의 얼굴은 영 떨떠름하겠지만 나는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어바웃 슈미트>를 바치고 싶다. “아버지도 이제 혼자 사는 법을 배우셔야지요”라는 헌사와 함께 말이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