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 음악이 있다
3년 전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작곡가 간노 요코의 도쿄 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 O.S.T 발매 기념 콘서트였다. 그 자리에는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도 와 있었는데, 이들에게 들은 공동작업 방법은 의외였다. 그토록 잘 어우러진 영상과 음악이 사실은 한두번의 미팅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감독이 곡이 들어갈 장면과 분위기에 대해 설명하면, 작곡가는 아, 그래요? 하고 돌아와서 ‘마음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끔은 영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다나.
물론 말이야 쉽게 했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곡을 만드는 사람이나 거기에 어울리도록 영상을 편집하고 연출하는 사람, 모두 만만치 않은 힘을 들였을 게 틀림없다. 다만 놀랐던 것은 아무리 호흡을 오래 맞춰온 사이라지만, 서로의 상상력이나 의외성에 기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도 박완규의 <천년의 사랑>이 <카우보이 비밥>의 영상을 뮤직비디오로 사용해 성공한 것을 보면, 치밀한 계산과 잦은 대화만이 능사는 아닌가보다.
한혜진, 안재훈 감독이 음악도 정해지지 않은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앗! 괜찮다!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이미 5분가량의 레이아웃 영상이 완성된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관운 이야기>는 죽마고우인 관(關)과 운(雲)의 이야기다. 그동안 대부분의 뮤직비디오가 음악 위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애니메이션 영상이 주체가 되어 음악을 고르겠다는 두 감독의 시도는 새롭고 도전적이다.
<관운 이야기>에서는 일단 도시적이고 사실적인 영상이 두드러진다. 세련된 캐릭터와 실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 소품을 보고 있자면 한혜진, 안재훈 감독이 형식뿐 아니라 표현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도시 거리와 누추한 뒷골목이 대조를 이루면서 영상은 흘러간다.
프로 복싱 선수인 ‘관’과 태권도 선수인 ‘운’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 각자의 길에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운은 도중에 경찰로 진로를 바꾼다. 그러나 복싱산업은 서서히 쇠퇴기에 이르고, 이윽고 관은 조직폭력단을 위한 도박 경기를 제안받는다. 한편 경찰에서 은퇴한 운은 어둠의 실체에 다가서고, 이를 눈치챈 조직폭력단은 여자친구를 미끼로 그를 유인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관과 운은 결투가 벌어진 건축 공사장에서 조우하고, 둘은 수많은 폭력단을 상대로 결투를 벌이는데….
처참하게 망가지는 이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에서는 과연 어떤 음악이 흐르게 될까. 기다려지고 궁금해진다. 내용은 염두에 두지 않고 봐도 ‘쿨’한 영상이다. 쿨한 영상 아래 절박하고 끈끈한 인간미가 흐르는 게 큰 매력이기도 하다.
연필로 몽상하기 스튜디오 홈페이지(www.mwp.pe.kr)에서 Club8의 <love in December>와 장남들의 <바람과 구름>에 맞춰 실험적으로 연출된 두 버전을 볼 수 있도록 준비중이다.
신곡 뮤직비디오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가수가 있다면, 어서 감독들에게 연락해보길 바란다. 영상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예 <관운 이야기>라는 제목의 곡을 만들어야겠다! 뭐 이렇게 나온다 해도 두 감독은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 같다 :-D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