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작하니, 인생 끝이군
“연애는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겪는 고통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에 없지만 나는 이 대목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팡세’ 같은 에세이를 뜻도 모르고 주워섬기던 시절에 구구단 외우듯이 습득한 문장 같은데, 술자리서 꽤나 자주 써먹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한번은 자칭 여성공포증이 있다는 친구에게 공포증을 치료한답시고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를 들이밀듯 이 말을 인용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말을 써먹는 것이 께름칙해졌다. 아무래도 이 말이 평생 경직된 모범생으로 산 노인의 탄식이거나 분방하게 청춘을 보낸 탕아가 말년에 뱉어낸 자기 위안의 독백 같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쪽이거나 나는 이 말을 인용할 군번은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이 말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찌그러진 육체의 시선에만 포착되는 삶에 대한 그럴듯한 통찰 때문이 아니라 그 바닥에 깔린 공정거래의 의지 때문이다. 내가 지금 지불하고 있는 육체적 고통은 앞서 자연으로부터 육체를 대여해 누린 쾌락에 대한 비용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것처럼 심원한 ‘공짜는 없다’가 있을까?
괴테는 인간이 공짜라고 생각하고 삼킨 것을 토해내는 나이를 서른일곱으로 봤다. 그는 “인간은 서른일곱까지는 하느님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살고 그 이후부터는 자신이 쌓은 것으로 산다”고 했다. 괴테가 정확하다면 서른일곱까지는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열정적으로 소비하며 살고, 그 다음부터는 사회적인 삶을 쌓아가면서 사는 게 정답이다. 이 권유대로 산다면 미련없이 연애경험을 쌓은 뒤 서른일곱 정도에 결혼해서 가정을 공고하게 지키는 게 자연스럽다. 직업을 결정할 때도 하고 싶은 일들을 이리저리 경험해보고 서른일곱 정도에 평생직업을 선택해서 정년이 될 때까지 유지하는 게 좋다. 한마디로 결혼이든 직업이든 본인이 확신하는 나름의 서사를 만든 뒤에 선택하는 게 맞다. 하지만 2003년의 서울은 이런 기획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사치한 여유를 부리면 결혼 시장에서 몸값이 폭락하고, 날품팔이로 살아가기 십상이다. 지금 사회가 권장하는 모범적인 삶은 괴테의 권유와는 사뭇 다르다.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 워런 슈미트는 가장 선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중산층으로 평생 산 사람이다. 퇴직 파티에서 한 동료는 “평생 헌신해 회사를 국내 최고의 자기에 올려놓았고, 가족을 정성껏 돌봤으며, 이웃과 진실한 우정을 나눴다”고 슈미트의 삶을 요약한다. 타인이 보기에 이 말은 별 하자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슈미트는 퇴직 뒤의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성이 한낱 모래성이었음을 깨닫는다. 몇 가지 인구통계학적 자료만 있으면 남은 수명을 계산해내는 그의 전문성은 명문대 출신의 새파란 후임에게 용도폐기된 주먹구구로 무시당한다. 정성껏 돌본 딸은 마뜩찮은 결혼을 반대하는 그에게 아버지가 언제 내가 관심을 보였냐고 반문한다. 42년을 함께한 아내는 이웃집 남자와의 불륜의 흔적을 유언장으로 남기고 떠나버린다. 결국 그는 “내 삶이 누군가의 삶에 조그만 변화라도 일으켰던가” 하고 탄식한다.
슈미트의 탄식에는 “연애는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겪는 모든 고통의 유일한 보상이다”고 말한 자의 회한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슈미트는 한번도 제도의 틀을 벗어나서 세상과 관계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모범적인 아내조차 슈미트의 친구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슈미트는 탄자니아의 고아소년에게 소액의 후원금을 보내는 편지도 한참을 망설이는 사람이다. 그는 학교라는 공간, 가정이라는 공간, 직장이라는 공간 속에서만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사회적 공간 속에서 키워온 슈미트의 외피 속에는 아내가 사라지자 일상적 생활조차 힘겨워하고, 내면을 읽어준 여자에게 곧바로 안기며 젖을 찾는 유아가 살고 있다. 그는 제도의 서사가 들려주는 달콤한 매혹을 믿고 달려갔지만, 그 서사의 마지막에 숨겨놓은 공포를 보진 못했다. 경제활동 연령이 지나 노년이 되면 조용히 세상의 어른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라는 제도의 명령 말이다. 하지만, 제도는 슈미트에게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경험을 할 시간을 주진 않았다.
기든스는 제도의 서사가 강고해지는 현대사회일수록 ‘자아의 서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아의 서사’는 제도의 서사를 개인이 재구성한 것, 그러니까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자격으로 세상과 연애한 경험의 기록이다. 슈미트는 자신의 공간 저 너머에 살고 있는 6살의 탄자니아 소년에게 생애 처음으로 일종의 연애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한 고백과 푼돈이 누군가의 생을 변화시켰다는 답신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받았다. 자아의 서사가 막 시작되는 순간, 슈미트는 60대 후반의 낡은 육체 속에 갇혀 있다. 그는 전 생애의 기억을 호명해서 운다. 나는 이 눈물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가 코미디인 게 다행스럽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어바웃 슈미트>, 세 가지 시선
▷▶ 건달,<어바웃 슈미트>를 보고 노인의 탄식을 듣다
▷▶ 일상을 배경으로 한 사회풍자 <어바웃 슈미트>
▷▶ <어바웃 슈미트>에서 발견되는 페인 감독의 개성과 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