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위성채널인 스카이 KBS Drama를 통해 드라마 <학교>를 다시 보니 새삼스럽다. 장혁, 안재모, 최강희, 양동근 등 지금은 내로라 하는 주연급 스타로 부상한 배우들이 한 교실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까닭이다. 다시 모여 드라마를 촬영하자면 출연료도 문제지만 각자 일정이 빡빡해 시간을 내기 힘들 테니 보기 드문 구경거리인 셈. 출연진이 워낙 많아 때론 한회에 대사가 10줄 남짓한 이 배우들 중에 그 여자, 배두나도 있다.
맨 뒤에서 두 번째 줄, 선생님의 시선이 좀처럼 닿지 않는 교실 한구석에서 무언가 끼적이고 있는 배두나(극중 이름도 배두나였다)는 조기 유학을 갔다가 국제통화기금(IMF)이 터지면서 귀국한 뒤 성격도 가치관도 달라져버린 아이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과 냉소적인 태도에서 너무 일찍 세상의 비밀을 알아챈 조숙한 아이의 외로움이 읽힌다. 사실 대학 입학을 목표로 모든 학생들이 숨가쁘게 내달리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왜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그 학생은 절로 아웃사이더가 되게 마련이다.
남과 같은 가치를 숭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에 회의를 품으면 남다른 혜안을 갖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막막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법. 배두나는 대학이 자신의 인생에서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쉽게 상처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터득해간다. 그리고 폭군 아버지와 매맞는 어머니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가출과 탈선을 거듭하는 친구에게 가장 현실적인 충고를 들려주며 위로한다. “지겹고 싫지만, 그래도 아직은 학교 안에 있는 것이 낫다”고, “지금 이 순간은 우리의 긴 인생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고. 평소 저런 아이가 있었나 싶으리만치 존재감이 없었는데 힘들고 우울한 어느 날 마음에서 우러난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속깊은 친구. 배두나는 심드렁한 얼굴 뒤에 따뜻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이 쉽지 않은 캐릭터에 꼭 맞는 배우였다.
<학교>를 졸업한 배두나가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로 관객 앞에 선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만만치 않은 세상과 맞닥뜨린 친구들이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보잘것없음을 절감하며 힘들어할 때, 태희는 “이 추운 세상이 그래도 살 만한 것은 친구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려 한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하고 변해가는 친구들로 인해 마음을 다치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신을 추스르고 친구들을 돌보려 애쓰는 태희 역에 배두나는 꼭 맞는 배우였다.
배두나는 그런 매력을 지녔다. 제일 예쁘고 제일 공부를 잘하고 제일 피아노를 잘 치거나 그림을 잘 그릴 것 같지 않은 매력.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보통 학생, 보통 직장인, 보통 여자 같은 느낌. 한편으론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도 쉽사리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굳은 심지와 주변 사람들을 티나지 않게 배려하는 사려깊음으로 보는 이를 순식간에 자신의 응원군으로 만들어버리는 힘도 지녔다. 배두나가 지난주에 방송을 시작한 MBC 미니시리즈 <위풍당당 그녀>에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지만 씩씩하고 억척스런 미혼모 은희 역을 맡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매력 때문일 것이다.
2회분 방송을 끝낸 <위풍당당 그녀>에선 아직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배두나만의 독특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쌍둥이 언니 금희에게 줄곧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소중한 사랑을 키워간다든지, 공부에 전념하는 언니 몫까지 집안일을 도맡으며 때론 입을 비죽거리지만 실은 진심으로 부모님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든지, 도둑질을 일삼는 불량스런 친구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너는 학교 짱이잖아, 나는 친구가 도둑질하고 사기치면서 사는 거 싫어!”라고 말할 때, 전작에서 보았던 배두나의 ‘그림자’가 언뜻 스치는 정도다.
더구나 <위풍당당 그녀>는 쌍둥이 언니가 실은 친자매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둘의 운명이 뒤바뀌면서 험난한 생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비밀>과 비슷하고, 사투리를 쓰는 깡촌 출신 억척이가 서울에 올라와 펼치는 좌충우돌 인생담이라는 점에서 <명랑소녀 성공기>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위풍당당 그녀>의 배두나를 지켜보고 싶은 건, 그가 <비밀>의 김하늘처럼 대책없는 청순가련으로 일관하거나 <명랑소녀 성공기>의 장나라처럼 ‘예쁜 배우가 망가지는 의외성’이 주는 재미에 의존할 수 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두나라는 배우, 그 독특한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성장할 수 있는 이유가 예쁘고 사랑스런 여성이 주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과거와는 조금 달라진 한국사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믿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