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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삶의 관성,<문라이트 마일>
김혜리 2003-03-18

■ Story

1973년 매사추세츠. 뚜렷한 목표가 없는 청년 조(제이크 길렌할)는 결혼하여 장인 벤(더스틴 호프먼)과 부동산 개발회사를 함께 운영할 계획이다. 그러나 약혼녀 다이애나가 레스토랑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으로 숨지자 조는, 딸 대신 그를 의지하는 벤과 쾌활한 독설로 비탄을 감추는 벤의 아내 조조(수잔 서랜던) 곁에 범인의 재판날까지 머물기로 한다. 청첩장을 회수하러 간 조는 베트남전에서 실종된 애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우체국 직원 버티(엘렌 폼피오)를 만나 교감한다.

■ Review

아들의 장례식날 “어떤 구두를 신을까?”라고 물은 남편을 평생 용서할 수 없다고 어느 이야기 속 주인공은 말했다. 그러나 영화 <문라이트 마일>은 무엇을 잃어도 천연덕스럽게 계속되는 삶의 지리한 관성을 인정한다. 도입부의 분망한 아침 풍경은 피크닉 준비인지 결혼식 채비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리무진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야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을 짐작한다. 부부는 딸을, 젊은이는 약혼녀를 묻고 집으로 돌아온다.

죽음이 하나의 일이라면 그 일은 순전히 생존자의 몫이다. <문라이트 마일>에서 죽음은 관을 맞추고 장례 출장요리를 섭외하고 은행 계좌를 해지하고 딸의 옷가지를 나눠주는 잡무를 통해 실물이 된다. 죽은 사람은 하나인데 벤과 조조, 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 벤은 사무실 회전의자에서 놀던 어린 딸을 기억하며 딸의 약혼자를 사무실 옆자리에 두려 한다. 조조는 친지들의 상투적인 조문에- 어떤 조문이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일일이 화를 낸다. 조는 사고 며칠 전 결혼을 취소했다는 비밀을 끌어안은 채 약혼녀의 부모를 떠나지 못한다.

<캐스퍼> <시티 오브 엔젤>를 만든 브래드 실버링 감독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문라이트 마일>에서 훨씬 날카롭게 관찰하고 냉철하게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 비탄은 100% 정제된 슬픔이 아니라 어리석은 농담과 분노, 자구책의 아말감이다.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보편적 테마에 호소력을 불어넣은 <보통 사람들> <우연한 여행자>가 그랬듯 <문라이트 마일>에서도 연기의 설득력은 중대하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부드럽게 변주한 더스틴 호프먼과 토비 맥과이어의 우울한 형제처럼 보이는 제이크 길렌할(<도니 다코>), 신예 엘렌 폼피오가 고루 훌륭하다. 클라이맥스의 폭발력은 미진하지만, <문라이트 마일>에는 깊이 이해하는 대상을 다루는 손이 갖는 확신에 찬 구체적인 리듬이 있다. 브래드 실버링 감독은 1989년 TV배우였던 연인 레베카 셰퍼를 광적인 스토커의 손에 잃었다. 그러나 굳이 주변의 실화를 거느리지 않아도 <문라이트 마일>은 충분히 감정의 진실에 기초한 영화다.김혜리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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