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카오스다. 선과
악 어느 하나로 규정짓거나, 자신의 의지로 올곧게 움직일 수 없는 혼돈. 누군가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마음 역시, 하나의 방향으로 일관되게
흘러가지 않는다. 애증이 들끓고 믿음과 배신이 자연스레 공존하는 곳. 이 세상이고, 곧 우리의 마음이다.
<카오스>는 우리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게,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호흡법과 스텝으로 흘러간다. 시작은 가정주부의 유괴사건.
남편인 고미야마와 점심식사를 한 뒤 아내인 사오리는 종적을 감췄다. 협박전화가 걸려와 고미야마가 돈을 가져가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괴사건은 자작극이었다. 사오리는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구로다에게 부탁을 한다. 조금 머뭇거렸지만 구로다는
성실하게 고객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은신장소로 돌아온 구로다는 사오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곳으로 걸려온 낯선 남자의
전화. ‘시체를 좀 처리해주지 않겠나.’
<큐어>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는 <카오스>의 전개에 대해 ‘이미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고, 공범자도 배반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연쇄의 시스템만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축적되어 검은 상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 가까스로 한개의 정답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 해체의 순서는 어떤 매뉴얼에도 없다’고 평한다. 유괴사건은 조작이고, 그 유괴사건의 의도조차도 조작이다. 처음에 유괴를 청했던 여자가
사오리가 아닌 고미야마의 애인 사토미임을 밝혀낸 뒤에도 <카오스>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사토미는 단지 구로다만 속인 것이
아니라, 고미야마에게도 감추는 것이 있다. 구로다는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단지 누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반전을 계획한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범죄와는 달리 <카오스>는 자꾸 심연으로 파고들어간다.
나카다 히데오, 공포영화 ‘전문’감독?
나카다 히데오는 반전되는 사건들을 독특한 리듬으로 처리한다. 돌변하는 상황들이 빗발치면서도, 하나하나의 호흡은 완만한곡선을 이룬다. 그러면서도 <링>과 <링2>를 만들었던 이력답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유지하는 데 능숙하다. 귀신은 겨우
마지막 장면에서야 나타나는데도, <링>은 시종일관 귀신이 우리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나카다 히데오는 숨막히는 긴장감이
어디에서 유발되는지 잘 알고 있다. 나카다 히데오를 공포영화 ‘전문’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나카다 히데오는 도쿄대학에 입학한
뒤, 영화평론가이자 현 도쿄대학 총장인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영향을 받아 영화로 진로를 바꾸었다. 시노다 마사히로의 표현사, 교토에 있는
다이에이촬영소 등을 전전하다가 입사한 곳은 닛카쓰촬영소. 이곳에서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빡빡한 조감독 생활을 7년간이나 지속한다.
92년 테레비아사히에서 방영한 <정말로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의 <유령이 머무는 여관> <저주받은 인형>
<사령의 연못>으로 연출을 시작한 것은, 나카다 히데오를 공포영화 ‘전문감독’으로 규정지었다. 장르영화 제작이 많은 일본에서
한 장르에서 역량을 인정받으면 비슷한 제의가 계속 들어온다. 하지만 나카다 히데오의 스승은 하스미 시게히코 또는 영국의 조셉 로지다. 94년
나카다 히데오는 조셉 로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의 제작에 착수한다. 동시에 <여교사일기,
금지된 성>과 <도촬난바도> 같은 어덜트 비디오물의 감독도 맡는다. 와우와우라는 위성채널에서는 역량있는 신진감독들에게 중편영화를
만들게 하는 ‘J 무비 워즈’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나카다 히데오에게도 연출을 의뢰하여 <여우령>을 만들었다. 96년 조셉
로지의 인터뷰집 <추방당한 혼의 이야기>를 번역한 나카다 히데오는 이후 <암살의 거리> <학교의 괴담f>
<링> <링2> <카오스> <유리의 뇌> <라스트 신> 등을 만들었다. <링>으로
메이저에 진입한 나카다 히데오는 이제 공포영화 ‘전문’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스릴러인가, 멜로드라마인가
<링2>를 끝내고 만든 <카오스>는 나카다 히데오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실증하는 작품이다. 사오리를숲 속에 묻고 올 때까지, <카오스>는 잘 다듬어진 스릴러물이다. 집에 도착한 구로다는, 이혼한 아내가 데리고 있는 아들을 발견한다.
이지메를 당하고 찾아온 아들을 재운 구로다에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타박한다. “무심한 사람. 전화 한통없이.” 구로다는 삭막한
음모에 걸려드는 하드보일드의 주인공답지 않게, 일상의 먼지가 가득 덮여 있다. 구로다를 보는 나카다 히데오의 첫 시선부터가 그렇다. 구로다의
심부름센터는 단지 허름한 집에 설치한 자동응답전화 하나뿐. 카메라는 너저분한 방 안을 훑어가다가, 낮잠에 빠진 구로다에 이른다. 이혼한
뒤, 홀로 살아가는 추레한 남자. 심부름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란 기껏해야 ‘바둑상대를 찾아주세요’라든가 ‘수도관이 터졌어요’ 등 너저분한
일들이다. 축 처진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어느 날, 유괴사건이란 기묘한 청탁이 들어오고 구로다는 카오스에 빨려든다. 아들을 데리고 이혼한
아내에게 가던 구로다는, 거리에서 사오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넋이 나간 듯 차에서 내린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을 꿨던 것일까.
그리고 <카오스>는 멜로드라마가 된다. 구로다와, 사오리의 행세를 했던 사토미. 사토미의 행적을 찾아가던 구로다는 그녀의 사진을
보고 문득 깨닫는다.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더 먼 과거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검은 슬립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는 달랐던, 과거의 그녀.
긴 머리를 묶고, 온통 물을 뒤집어쓴 청초한 모습의 그녀. 이미 구로다와 사토미의 붉은 실은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걸 묶은 건, 바로
사토미다. 구로다는 거기에 엮이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누가 감히, 그녀를 외면할 수 있을까. 그녀의 ‘붉은’ 열정을. 활활 타오르는
생의 불꽃을. 마침내 그녀를 찾아낸 구로다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치는 사토미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날 찾아낼 줄
알았어. 그냥 왠지 다시 보고 싶었어.” 구로다는 이미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나카다 히데오는 이전까지 자신의 영화가 ‘바람이 불지 않’는
결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촬영소 출신이기 때문에, 세트 촬영에 더욱 능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토미와 구로다가 함께 뛰어가는 이 장면은,
<카오스>의 백미다. 뛰어가는 사토미의 웃음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힌다. 그런 순간을 맞이한 구로다가 너무나 부러워진다.
소유할 수 없는 여자, 삶의 카오스
<카오스>는 사토미의 영화다. 여자라는 존재의 극단적인 두 얼굴을 함께 드러내는 나카타니 미키의 연기는 놀랍다. 나카다 히데오의
영화는 유난히 여주인공이 돋보인다. <링>의 주인공을 여자로 바꾼 것도 어쩌면 나카다 히데오의 취향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영화 속 히로인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는 타입이기 때문에 (<카오스>가) 지금의 스타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처럼, <카오스>는
사토미의 변신, 아니, ‘카오스’에 경도되어 있다. 사토미가 사오리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모델인 사토미는 광고주였던 고미야마와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사토미의 집에 고미야마가 찾아왔을 때, 사오리가 들이닥치고 칼로 고미야마를 공격한다. 그는 사오리의 목을 조르고, 그녀는
숨진다. 그가 자수하겠다고 풀이 죽은 소리로 말할 때, 사토미는 말을 막는다. “난 싫어요, 이대로 끝낼 순 없어.” 그리고 사토미는 고미야마를
몰아붙인다. “똑바로 말해 봐, 내가 사오리와 닮았다고 했지.” 모든 계획을 짜고, 사토미는 구로다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고미야마의 불륜의
상대에 불과하던 사토미는, 모든 관계를 역전시키고 두 남자의 머리 위에 선다.
이 순간 사토미는 전형적인 필름누아르의 ‘팜므 파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토미는, 단순히 남자를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악녀가 아니다. 그녀는
삶의 카오스다.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욕망, 에로스의 현신인 것이다. 그녀를 만났을 때 구로다는 욕정을 느낀다. ‘리얼리티’를 위해, 구로다는
사오리의 손목과 발목을 묶는다. 그리고 갑자기 돌변한다. “부자들 돈장난도 여기까지야.” 하지만 구로다는 알고 있다. 이건 단지 ‘의뢰’일
뿐이라고. ‘리얼리티’를 선사한 뒤, 구로다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이런 광경은 또 한번 되풀이된다. 사토미를 찾아낸 구로다는, 다시
한번 사오리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준다. 당신에겐 진한 색이 잘 어울린다며. 구로다와
사토미의 감정이 은밀하게 교류하는 이 두 장면은, <카오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사토미의 손목을 묶은 뒤 두 사람의 눈이
느리게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격동치는 감정은, 화면 아래에서 맹렬하게 꿈틀거린다. 잊어버리고 살았던 그들의 ‘카오스’는 침묵 속에서,
울부짖는다.
나카다 히데오는 하드보일드 소설 <사랑받고 싶은 여자>를 각색하면서, 남자의 이야기를 여자 중심으로 바꿔놓았다. 그녀는 사랑받고
싶은 여자가 아니라, 생의 카오스를 사랑하는 여자다. 자신의 운에 모든 것을 맡겨보는, 생의 불꽃이 인도하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여자. 구로다가 원한 것은 그녀의 사랑이지만, 그녀의 ‘카오스’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모든 것을 끝내고, 차 안에서 사토미를 애무하던 구로다는
그녀에게서 칼을 발견한다. 그리고 망설인다.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에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토미의 ‘함께 가자’라는 말에도,
그는 슬그머니 손을 놓아버린다. 그녀는 혼자 절벽으로 웃, 으, 며 뛰어내린다. 그녀를 소유할 수 있는 남자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오스>는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남자가 갈망하는 매혹적인 ‘혼돈’에 눈이 멀게 한다.
김봉석 기자